이윤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재융합측정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윤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재융합측정연구소 책임연구원

최근 수년간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화두는 임무·재정립(Role & Responsibility)과 연구 수월성 확보다. 단기간의 압축성장으로 우리나라의 경제와 산업환경이 크게 바뀌었고 출연연을 둘러싼 연구주체들의 과학기술 수준도 높아졌다. 당연히 출연연의 새로운 발전방향 제시가 필요한 시기다.

그러나 연구자 중심의 연구개발 혁신이나 수월성 확보라는 제언들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아마 연구의 주체인 연구자들의 공감이나 능동적인 호응이 결여됐고, 사람보다는 시스템 혁신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일선 연구자들이 피부로 느끼기 힘드는 것 같다.

필자는 수월성의 정의와 함께 일선 연구자가 수월성을 어떻게 쫓을지 제안해 보고자 한다. 연구 수월성 (秀越性· Excellence)은 빼어나고, 뛰어넘는다는 한자의 원래 의미에 비추어 단연코 ‘일류연구’로 정의할 수 있다. 더불어 우리보다 먼저 연구 수월성에 대해 고민이 깊었던 유럽의 사례를 살펴봤다. 2000년대 초반 유럽은 심각한 연구인력의 해외유출 문제를 겪었고, 대응책으로 수월성 연구사업과 연구 수월성을 평가하는 객관적 잣대, 예를 들자면 Research Excellence Framework(영국)나 Research Excellence in Science and Technology Indicator(EU) 를 만드는 노력이 있었다. 최근 네이처에 기고된 글에서 독일은 수월성 추구의 가시적 성과와 함께 연구에 있어 보편적 기회균등의 감소와 같은 부작용도 겪었다고 보고했다. 이제 연구 수월성은 일류연구라는 협의적인 정의와 함께 연구과정의 견실성, 연구능력, 사회적 파급은 물론 정반대에 있는 기회균등 개념까지 포괄하는 광의적 개념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협의의 수월성에 집중하고자 하며, 이때 수월성은 경쟁관계에 있는 각국의 연구자들 수준을 뛰어넘는 출중함을 의미한다. 이런 출중함에 도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일까? 명료한 정답은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주제 혹은 접근법과 같은 ‘미증유의 길’을 찾으면 된다. 너무 당연한 답으로, 앞서 걸어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선점한 연구주제의 리더일 수밖에 없다. 결국 수월성 추구의 첫 단추는 창의적이고 묵직한 연구주제의 도출, 혹은 주요한 문제제기로 귀결되며, 필자가 속한 연구팀의 모토인 ‘남들이 하지 못하는, 하지 않는 연구’가 하나의 실마리일 수 있다. 과학기술이나 산업에 있어서 파급효과가 큰, 남들이 하지 못하는 연구주제는 많은 경우 이미 드러나 있다.

지난 199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스티븐 추의 ‘레이저를 이용한 원자의 냉각과 포획기술’은 그가 벨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시절, 연구소에 떠도는 난제 중 하나였다. 또한 남들이 하지 않는 연구를 위해서 우공이산(愚公移山) 고사의 우공이 될 필요도 있다. 일본 물질재료연구기구가 무려 40년 8개월간 지속한 고온에서 금속봉을 잡아당기는 크리프(creep) 시험 사례를 기네스북에 등재 신청했다는 2009년도의 신문기사는 ‘왜 이들이 소재분야의 강자인가’를 한 눈에 보여준다. 수십년의 노력으로 그래프 하나를 만드는 묵묵한 연구는 당장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수많은 연구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기준 데이터를 제공함으로써 연구집단의 연구분야에 대한 기여도와 영향력을 키워준다.

출연연의 새로운 도약과 연구 수월성 추구에 대해 모든 연구원들의 생각이 하나일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이 위기이고, 이를 기회로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면 수월성을 향한 연구원들의 마음가짐이 바뀌어야 한다. 관행적인 연구를 떠나 가본 바 없는 새로운 연구를 하겠다는 선언적인 행동과 남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혹은 연구분야에서 꼭 필요하지만 오랜 묵묵함을 요구하는 주제를 찾기 위한 밀도 있는 천착이 필요하다. 구체화된 주제를 인생연구로 설정하고 달려드는 용기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높은 목표를 향해 노력 중인 동료에게 박수를 보내는 연구문화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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