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파르테논 신전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등 삼 대륙 사이에 있는 ‘육지 속의 바다’ 지중해(Mediterranean Sea)는 동부·중부·서부로 나눈다. 이중 그리스(Greece)는 동부 지중해로 뻗어 나온 발칸반도 끄트머리에 있는 반도 국가로서 본토와 지중해에 산재한 1400여 개의 섬으로 면적은 13만 1000㎢에 약 1100만 명이 살고 있다.

지중해는 발칸반도 동쪽을 에게해(Aegean), 남서쪽을 이오니아해(Ionia)라고 하는데, 그리스 고전 문명은 크게 BC 3300~BC 2000년경 에게해의 30여 개 섬인 키클라데스 제도(諸島)에서 발달한 키클라데스 문명(Cyclades), BC 3650~BC 1170년경 크레타섬에서 발달한 크레타문명(Crete), BC 1600~BC 1100년경 그리스 본토에서 발달한 미케네 문명(Michaene) 등 셋으로 나눈다. 이렇듯 그리스 고전 문명이 본토가 아니라 지중해의 섬들에서 시작된 것은 지중해에서 여러 민족과 교역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게 한다. 특히 그리스 본토에서 약 160㎞ 떨어진 크레타섬에서 발달한 크레타문명은 전설의 왕 미노스(Minos)의 이름을 따서 미노스문명이라고도 한다.

호메로스

미노스 왕의 크노소스 궁은 지하나 반지하에 수많은 방과 통로를 배치하여 빠져나오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미로(迷路) 혹은 미궁(迷宮: labyrinth)이라고도 하는데, 미로는 이집트 12대 왕조 아메넴헤트 3세가 최초로 건축했다고 한다. 지중해 무역을 하며 이집트의 문물을 전해 받은 미노스 왕은 아테네 출신 다이달로스(Daidalos)에게 궁을 짓도록 했는데, 왕비 파시파에가 매우 음탕하여 황소와 관계한 후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를 낳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감추려고 미궁을 짓게 한 것이다.

헤시오도스
올림포스 제우스신전

그리고 크레타보다 국력이 약한 아테네에게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청년들을 명령했는데, 이때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Aegeus)의 왕자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고 달아나자 다이달로스를 미궁에 가두었다. 다이달로스는 새의 깃털을 모아 날개로 만들어 탈출했지만, 아들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하늘 높이 날아가다가 깃털에 붙인 밀랍이 녹아서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후 불가능한 인간의 어리석은 꿈을 '이카로스의 날개 혹은 이카로스의 꿈'이라고 하고. 미궁, 미노타우로스 전설이 만들어졌다.

아무튼, 크노소스 궁은 벽에 석회 칠을 한 뒤 석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서 물감이 자연스럽게 벽에 스며들게 하는 프레스코화(Presco)를 비롯하여 고대 건축물 유적, 도자기·작은 조각, 그림이 발달했다. 프레스코 기법은 이후 널리 유행하여 중세 유럽의 대부분 궁전, 성당의 천정과 벽화가 프레스코화로 제작되었으며, 중국·한국·일본 등 아시아 각국에서 그려진 불교 벽화들도 프레스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미노스문명은 BC 1400년경 그리스의 침입으로 파괴될 때까지 약 2세기 동안 에게문명의 중심이 되었는데, 1900년부터 발굴로서 호메로스(Homerus)가 오디세이에서 '위대한 도시 크노소스, 미노스 왕이 9년 동안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사실로 증명되었다.

제우스(고고학박물관)

한편, BC 1600년경 그리스인들은 이오니아의 트로이(Troy)를 정복하고 에게해를 차지했다.

BC 3000~BC 2000년경까지 발달했던 트로이의 상황은 BC 800년경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오디세이아에서 트로이 전쟁 기록으로 알게 되었지만, 그동안 전설과 신화로만 알았던 트로이 문명은 1876년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 트로이에서 청동기 문명을 발굴함으로써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 황금을 캐려고 하는 야욕에서 발굴을 시작한 슐리만은 이곳에서 BC 2000년대에 번영했던 황금으로 만든 아가메논 가면과 많은 금화를 발굴했으며,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미케네와 크레타섬에서도 사용되었던 그리스문자가 해독되어 BC 3000년경 그리스 선주민들의 신화를 바탕으로 미케네·크레타·히타이트·페니키아·이집트·메소포타미아문명 등 해양문화의 영향으로 더욱 정교하게 발달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포세이돈(고고학박물관)

BC 1200년경 그리스는 인도유럽어족인 도리아 족의 침략으로 암흑시대를 맞았으나, 도시국가들의 느슨한 복합체 형태로 암흑시대를 벗어나면서 BC 7세기경 그리스 본토에서 미케네 문명을 이룩했다.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문명과 에게문명을 흡수하여 발달한 청동기 문명이다.

아테네는 BC 8세기에 왕정시대, 귀족정치, 참주정치를 거쳐 BC 6세기에는 세계 최초로 민주정치를 시행했는데, 특히 BC 5세기에 3차에 걸쳐 이민족인 소아시아의 페르시아 침략을 물리치고 페리클레스 시대에 최고전성기를 맞이했다.

포세이돈(바티칸박물관)

일찍이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은 아시아 서쪽 지중해 연안에서 에게해에 이르는 이오니아까지 정복하고, BC 500년경 다리우스 1세 때에는 동쪽 인더스강에서 에게해 북쪽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 이오니아의 중심이던 밀레투스가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키자 그리스 본토의 에레트리아, 아테네가 지원군을 보내니, BC 492년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본토 공격에 나섰다. 이때부터 BC 479년까지 계속된 세 차례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아테네는 세계제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BC 490년 페르시아가 아테네를 공격한 1차 전쟁은 아테네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때 유명한 마라톤 전투 전설이 생겼다.

아테나 여신(아테네 대학)
아폴론 상

그 10년 후 페르시아가 2차 침략했을 때, 그리스의 동맹군을 지휘한 장군은 스파르타 왕 레오디나스로서 그의 영웅적인 활약은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의 전사 300명의 희생으로 그렸다. 마지막 세 번째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를 대파하여 승리를 거뒀다. 이민족인 페르시아와 전쟁에서 승리는 그리스가 지중해를 지배했음을 말해주며, 페리클레스가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 신전, 승리의 여신 니케 신전, 풍요의 신 아르테미스 신전 등 많은 신전을 세운 것은 곧 전승기념물이었다. 신전들은 오늘날 성당이나 교회처럼 신자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신상(神像)을 안치하고, 봉납된 보물 등을 저장하는 성소(聖所)였다.

그러나 융성하던 그리스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다툼으로 국력이 쇠약해지더니, BC 313년경 발칸반도의 북부에 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망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삼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문화를 융합시켜 새로운 헬레니즘(Hellenism)을 탄생시켰으며, 그 후 로마제국이 그리스를 점령하여 그리스의 문화 예술은 로마로 옮겨갔다.

아프로디테(고고학박물관)
헤라클레스

그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당한 이래 1차대전으로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나라를 잃은 기간이 2000년이 넘는다. 그리스의 국기는 흰색과 파란색이 교차한 9개의 가로줄을 바탕으로 하는데, 하얀 십자(十字) 줄무늬는 그리스 정교를 상징하고, 파란색은 지중해와 에게해 그리고 그리스의 영공을 상징한다고 할 만큼 그리스는 지중해와 밀접하다. 또, 9개의 줄무늬는 1821년 오스만제국 지배 시절 독립운동을 벌일 때, 자유냐 죽음이냐를 9번 반복하며 9년간의 독립전쟁을 상징한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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