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직 을지대 교목

주형직 을지대 교목
‘우리’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우리는 인칭대명사로 나에 대한 복수 형태를 일컫는 말이지만 타인을 내 영역으로 끌어들여 일체화시키는 아주 친밀한 단어다. 우리로 지칭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배제의 언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나와 내편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하고 관형적으로는 친근함을 표시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우리라는 말이 주는 따뜻한 어감이 혼자가 아니라는 막연한 위로를 제공하기도 하고, 우리로 지칭하는 대상으로부터 보호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도 한다. 우리라는 말에 관계성과 기대감을 품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로 묶어버린 이들과의 친밀한 관계성에 대한 기대심리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우리로 살아가고 싶은 우리, 그러나 이 시대 우리는 우리로 살지 않는다. 우리라는 말이 전제하는 공동체적 의무감과 책임감이 부여되지만 그것이 적잖이 부담스럽기에 거부하며 살고 있는 탓이다. 각자도생이 삶의 유일한 대안처럼 느껴지는 현실에서 공통분모, 같은 편으로 엮여 피곤해지기 싫은 것이다. 이 때문에 따뜻한 위로와 든든한 보호를 절실히 원하면서도 우리로 살아가기를 거부한다.
 
고개를 돌리고 귀를 기울여야할 주변의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애써 외면하며 ‘무슨 상관인데’를 외친다. 그러나 주변 이야기에 관심 갖지 않으면 결국 자신에게 갇힐 수밖에 없다. 점점 더 나를 탐닉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이처럼 에고(ego)를 증폭한 결과는 우리라는 공동체성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교훈하듯 스스로 기준이 되려는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에고 속에 갇혀 있으면서 궁극적 판단의 주체가 되려는 것 자체가 타자에 대한 지배적 욕망이다. 이 욕망이 힘을 추구하면 오도된 권력이 된다. 오도된 권력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지 않는다. 자기 외의 모든 대상을 수단으로 하고 스스로를 절대화한다.
 
그로 인해 관계하는 모든 것과의 이해와 배려는 거부하고 소통과 친절은 계산적이다. 사랑과 용서는 말 뿐이며 완악하고 비정하다. 예의는 사라지고 조롱과 비난, 혐오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로 살지 않는 이들의 정서는 이미 부당하고 억울하며 분노에 가득 차있다. 이것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자기 안에 갇혀 억울함과 분노 속에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 누군가는 ‘상향평준화된 욕망 때문에 불행하다’고 지적한다. 다른 누구는 ‘경쟁과 성과중심으로 몰고 가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라 말한다. 모두 일리 있는 지적이다. 구조적으로 보면 치열한 경쟁과 빈약한 사회안전망이 개인의 삶을 위기로 내몰면서 자꾸만 자기 안에 갇히도록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사회 구조적인 차원으로 분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모든 문제는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이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사회적인 차원으로 몰아가며 개인적인 차원의 답을 찾는 것에 소홀한 점이 있다. 스스로를 부인하고 성찰하며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 미흡했다는 뜻이다.
 
사회적으로 보면 우리 자신은 언제나 을(乙)이고 피해자였으며 부당한 권력과 불공정한 질서 속에서 억울하게 살았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만 특정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언제나 을의 입장인 것 같지만 누군가에게는 갑(甲)으로 살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항상 억울하게 당한 것 같지만 의도치 않게 휘둘렀던 나의 부당한 칼날에 상처 입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로 구분해 분노를 키우고 자신의 입장에서 사안을 해석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어느 한쪽으로 자신을 규정하면 시야는 좁아지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게 된다. 우리는 결코 온전하지 않다. 실수도 많고 비겁할 때도 있으며 정의롭지 않을 때도 많이 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더 어렵다. 더욱이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는 순간 그것이 약점이 되는 사회에서는 정말 그렇다. 그럼에도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성찰하면서, 용서를 구하지 않고는 이해와 회복은 없다. 무엇보다 희망이 없다. 결코 우리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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