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

“우리 민족인 북에 총을 겨눠 공을 세운 사람이 현충원 안장이라니.” 이 말은 얼마 전 영면하신 6·25전쟁 영웅 고 백선엽 대장에 대해 한 시사토론 프로그램에 나온 어떤 여변호사의 말이다. 이 변호사의 국가관은 무엇일까. 진의가 어찌됐든 이 말을 되씹으며 20년 전 국군전사자 유해발굴을 시작할 당시 주위로부터 들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소위 조국해방전쟁을 방해한 국군 전사자를 발굴해 모시는 일이 통일방해세력이라는 그 말과 같은 궤를 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백선엽 장군과 그의 국군 1사단이 사투를 벌여 한국전쟁의 승기를 잡은 다부동지역은 내게 많은 생각과 의미를 주었던 곳이다. 지난 1950년 8월 불과 20일 사이에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 2만여 명과 한국군 1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전사했다. 그중 3.28고지, 369고지(숲데미산), 유학산 등은 다부동 지역 방어의 요충지로 수많은 남북의 젊은이가 남침의 야욕에 일으킨 전쟁에 동원돼 꽃다운 청춘들이 스러져간 전투지역이다. 1000만 관객을 불러 모았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됐던 고 최승갑 일등병의 유해가 발굴된 곳이 바로 369고지이다.

최초의 국군전사자 발굴은 2000년 3월 다부동 지역에서 시작됐다. 그해 5월 어느날 나는 국군발굴병력과 같이 369고지 능선을 따라 유해를 찾고 있었다. 정상 근처에서 잠시 휴식 중 한 병사가 “왜 유해가 안 나오지?” 하면서 땅바닥을 두드렸는데 ‘쿵쿵’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보고했다. 즉각 그 지점을 발굴하자 옛 참호 흔적이 나오면서 웅크린 자세의 국군병사 유해가 유품들과 같이 놓여 있었다. 현장에서 유해와 유품을 조사하던 중 색 바랜 초록색의 삼각자에 ‘최승갑’이란 이름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현지조사에 동행했던 모 방송사의 도움으로 가족들을 찾을 수 있었다. 다음날 미망인과 유복녀가 현장에 오셨다. 걷기 힘든 미망인은 병사의 등에 업혀 산으로 올라오셨고 전사한 남편의 뼈라도 보시겠다는 말씀에 태극기에 덮인 유해를 풀어 50년 만에 두 분이 만나도록 해 드렸다. 20대 초반의 건장하던 남편이 앙상한 뼈로 변한 모습에 미망인은 유해와 유품을 잡은 채 통곡을 하셨다.

발굴과정은 모두 방송됐으며 한 영화감독이 이 내용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공전에 대히트한 ‘태극기 휘날리며’이다. 영화에서는 삼각자 대신 만년필에 새겨진 이름으로 대신했지만.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까지에는 말 못 할 난관을 헤쳐야만 했다. 최 일등병의 안장식에서도 미망인이 한때 재혼했다는 까닭으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다부동의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과연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했을까. 한 사람의 생전에 대한 공과 사가 분명한 기준으로 평가되기를 바라며 백 장군님과 최승갑 일등병님은 과거 다부동 전장에서는 사단장과 병사관계였지만 이제는 조국을 지킨 영웅으로 대전현충원에서 같이하시어 대한민국을 지켜주실 것이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 대한 국가와 국민의 진심 어린 추모와 배려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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