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자통신연구소 연구원 생활 11년
우연찮은 계기 통해 벤처붐 속 창업길
제품 R&D 강점 보였으나 영업력 부족
유연한 대처로 다양한 제품 개발 성공
R&D 무기로 최근 새

[금강일보 김현호 기자] 생물은 생존을 위한 무기를 하나씩 갖고 있다. 초식동물은 빼어난 속력을, 육식동물은 강력한 앞발과 이빨을 앞세워 정글에 몸을 부친다. 심지어 일부 식물은 강력한 독성을 뿜어내며 자신을 지킨다. 이는 비단 동식물 생태계에서만 작용되는 건 아니다. 냉혹한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기업의 생태계에서도 각자만의 무기는 곧 생존과 직결된다.

누군가는 풍부한 자본력을, 누군가는 뛰어난 기술력을, 누군가는 한우물만 파는 뚝심을 장착해 기업을 영위한다. 대전 유망중소기업인 ㈜에드모텍의 무기는 조금 특별하다. 주어진 환경에 굉장히 유연한 CEO와 강력한 기술개발을 보유한 회사의 ‘꿀조합’이랄까. 이창화(60) 대표이사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의도치 않게 들어선 CEO의 길

이 대표가 학창생활을 보냈던 1970~80년대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정치 시국을 빼고 논하면 농촌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급변하며 기술강국의 씨앗을 뿌리던 배태기((胚胎期)였다. 머리가 굵어지며 그는 앞으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공학이라고 생각했단다. 진로를 일찌감치 결정한 그는 공학에서도 특히 반도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고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며 1989년 한국전자통신연구소, 현재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 입사했다.

당시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1가구 1전화 시대를 연 전자식교환기(TDX)를 비롯해 다양한 정보통신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국내 최대의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 엘리트 중 엘리트만 모인다는 곳이었다. 우스갯소리로 학창시절 전교 1등은 자랑거리도 아니었을 정도다. 이 대표는 이런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다양한 R&D로 성과를 냈고 사내에서 제법 실력 있는 연구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성과에 대한 압박은 있었으나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니 큰 스트레스는 없었다고. 그렇게 크게 모난 점 없이 연구원 생활을 이어갔고 선임연구원이란 자리까지 올랐다. 당연히 연구원으로 시작해 연구원으로 결실을 맺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연구원 생활 11년째인 2000년 무렵이 되자 그의 운명은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민국에선 벤처붐이 한창이었다. IMF 사태로 일자리가 사라지자 기술력만큼은 자신 있었던 사람들이 창업에 나섰고 이 중 일부의 성공신화는 벤처붐에 불을 붙였다. 정권도 벤처 창업의 불쏘시개를 자처하며 신화창조의 꿈을 부추겼다. 그 때 이 대표의 안방마님이 넌지시 얘기하기를 “창업하면 돈 좀 버나 봐.”

이 대표는 진지하게 창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박차고 나서기엔 너무나 막연했다. 갈피를 못 잡는 시기에 같은 연구소 출신 지인이 창업을 했다는 소식을 갖고 이 대표와 마주했다. 그 자리에서 지인은 “특정 기술을 가진 기업과 협업을 하고 싶은데 마땅한 기업이 없어 힘들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지인이 필요로 하는 특정 기술은 이 대표가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에드모텍은 2000년 엄청난 벤처붐 속에서 탄생했다.

 

#. 부족한 영업력 메꾼 유연함

이 대표는 에드모텍을 창립하고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핵심 반도체를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출신이란 점 때문에 투자 문의는 상당했다. 적지 않은 투자금으로 R&D에 착수했고 대기업에 납품되는 타사의 제품보다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정도 기술력이면 시장에서 반드시 선택받을 것이란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이 대표와 같이 일했던 연구원 3명이 함께 에드모텍에서 만든 제품은 분명 뛰어난 기술력을 갖고 있었지만 휴대폰 제조업체를 찾아가면 이들에게 양산할 인프라를 갖췄는지, 제품에 하자가 생겼을 경우 매뉴얼은 갖췄는지 등을 물어왔다. 연구소에서 11년 생활하고 창업하고 나서도 R&D에만 착수했으니 그런 것까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제품을 완성하고도 좀처럼 시장에 진입하질 못 한 거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출신이 창업을 해서 그런지 투자금은 상당했습니다. 이를 밑천으로 시장에서도 충분히 통할 만한, 아니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죠. 제품을 갖고 영업을 해보니 모두가 성능 부문에선 흡족해 하더군요. 그런데 다른 부문에서 문제가 있었죠. 제품을 양산할 환경도 안 되고 하자가 생겼을 경우를 대비한 품질보증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겁니다. 이제껏 몰랐던 진정한 기업의 세계가 펼쳐지더군요.”

뛰어난 제품을 갖고 시장의 문을 두드려도 좀처럼 에드모텍에겐 열리지 않았단다. 창립 후 4년 정도 되자 투자받은 돈이 바닥났다. 이 같은 방법으론 10년이 가도 안 될 것이란 생각에 이 대표는 영업 대신 자사의 기술력을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자 눈에 띈 게 ‘통신부품 국산화 사업’이란 국가과제였다. 해당 사업은 이미 다른 기업이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 대표는 그 기업을 찾아가 자신의 제품을 보여줬다. 기술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대표의 제품은 국가과제 달성 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뛰어난 기술력을 가졌다는 입소문이 났고 판로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보통신기술은 에드모텍 같은 중소기업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발달했고 여기에 중국 기업까지 국내 시장에 진출하며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휴대전화 시장에선 애플이 등장하며 더욱 성장할 줄 알았으나 규모가 크지 않은 에드모텍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이 대표는 여기서 중대한 결정을 한다. 휴대전화 핵심 반도체 시장이 아닌 기존 기술력을 살려 국방산업에 뛰어 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제법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로 판로가 생기긴 했으나 업체 간 치킨게임이 너무 심했습니다. 에드모텍이 살아남긴 위해 다른 시장을 발굴해야 한다고 판단했죠. 다행히 당시 원청 중 일부가 국방산업으로 향했고 에드모텍과 계속해서 같이 일하길 원한다면서 관련 기술 개발이 가능하냐고 묻더라고요. R&D 관련해서 에드모텍이 안 될 게 있겠습니까.”

 

#. 또 다른 시장 진입 준비

국방산업으로 향한 에드모텍은 휴대전화 핵심 반도체 기술을 기반으로 통신장비에 들어가는 모듈과 레이더 관련 부품을 개발했다. 역시 성능은 최고였다.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던 터라 이전과 같이 시장 진입에 크게 애를 먹진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시장에 진입한 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드모텍은 또 다른 시장으로의 진출을 준비 중이다. 산업용 하이파워 시장으로, 현재 6㎾ 공급 제품 완성을 앞둔 상태다. 6㎾면 고집적으로 분류되는데 웬만한 제품에 충분히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는 수준이다.

“언제나 유연하게 대응하며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나름의 준비를 철저히 하고 창업의 길로 들어섰지만 세상은 생각대로 되는 경우는 없죠. 하이파워 제품 역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철저히 준비했지만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이 대표는 위기가 있을 때마다 늘 유연하게 대처하며 에드모텍을 한뼘씩 성장시켰다. 현재 개발 중인 제품은 에드모텍이 한 번도 도전해보지 않은 분야이긴 하나 그들의 무기는 시장의 변화에도 언제나 훌륭하게 대처했다. 그렇게 이 대표는 자신의 무기를 늘 갈고 닦는다. 20년 성상은 그저 축적된 것이 아니다.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사진=함형서 기자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