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의 이야기가 아니며, 톨스토이의 작품 '부활'에 얽힌 말이 아니다. 지금 내 삶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누구든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고, 용서를 구하고 받을 수 있다. 누구든 상처를 준 자를 응징하고 싶고, 사과를 받고 싶고, 위로를 받고 아픈 부분이 말끔히 씻겨지기를 바란다. 그 과정에서 잘못한 자는 벌을 받아야 하고, 깊게 뉘우쳐 다시 새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어처구니없이 피해를 입은 이에게는 그가 충분히 납득될 수 있도록 사과가 되어 적개심을 넘어 용서의 맘이 나오게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때, 상처를 입은 사람의 상처가 아물고, 상처를 준 사람이 용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둘이 받은 양심의 상처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남을 것이다. 그것은 또 다시 어떤 잘못을 저지를 수 없게 하는 방패막이 될 지언정, 영원한 지옥불의 처단은 아닐 것이다.

양심은 참으로 날카롭고 예민한 것이라서,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고,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한 구석 작은 상처가 났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체를 괴롭히고 건드린다. 그래서 특별히 양심이 날카롭게 살아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잘못이나 남의 그릇됨에 대한 관용이 어렵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양심은 날카롭고 예민하게 살아 있어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래도 나는 최근 이런 맘으로 살고 싶다.

“윤동주 시인이 ‘서시’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간절히 빌 때/ 한 때 나도/ 많은 사람들처럼 매우 좋아했지만/ 나는 이제 그렇게 살 수 없음을 알기에/ 그 시를 더 이상 가슴에 품지 않겠다// 다만 나는/ 더럽고 미약한 채로/ 상처투성인 채로/ 모순을 가득히 안은 채로/ 엉거주춤/ 벌벌 떨고 서 있는 나를/ 맞아주던 어머니에게 안기듯/ 님 앞에 가지도 못하는 나를/ 어여삐 받아주시리라/ 그 님을 믿고 싶다/ 그렇게 나는 당당히 걷고 싶다/ 넘어질 듯 뒤뚱거리며 걷는 아이처럼.” 구멍 난 양심을 헝겊으로 겹대어 누더기처럼 된 처지가 되었다 할지라도, 엄마처럼 나를 맞아줄 그 님, 그 사회,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고 비칠거리면서도 당당히 살고 싶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간 사람이야 말이 없지만, 가는 것으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고 보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한, 다만 용서할 수 있는 사과의 말 한 마디를 듣고 싶었다는 그 피해고소인의 심정은 어떠할까? 치유가 될까? 원망으로 한 삶을 살게 될까? 그는 그렇게 또 많은 상처를 안게 되었고, 그에게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떠나간 그 사람에 대하여 던지는 사회와 많은 사람들의 질타는 또 다른 상처를 그와 가족과 사회에 던지고 있다. 가해자라고 고소된 이가 없어진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의 일들은 피해고소인도 원하지 않는 것일뿐만 아니라, 상처를 주고받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길도 아니라고 본다. 사회는 피해고소인을 더 이상 사회논의의 장으로 직접 끌어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 피고소인에 대한 문제 역시 그 한 방으로 그의 인생 모든 것을 매도하듯이 정리해버리려는 의도를 버려야 한다. 아무리 못된 일을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공인이었다면, 그가 한 일의 공과를 분명히 갈라서 평가하는 냉철한 구별의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박원순 선생이 이 사회를 위하여 평생 애써서 이루려고 했던 것들은 아주 참 탁월했다고 본다. 그 일 중에는 끊임없이 우리 사회가 이어나가면서 추구해내야 할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가 실수로 문제를 일으킨 부분은 적극 우리 사회가 근본부터 논의하고 생각하여 고쳐야 할 일이다. 그것은 어느 한 개인의 잘잘못으로 평가할 때 해결되지 않는다고 본다.

또 지금 논의되는 방향과 내용처럼 성인지 문제나 성의식을 진영의 논리로 처리하려는 인상을 주는 것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성에 대한 우리 역사와 사회와 문화와 종교 등에서 논의되어 왔던 것들, 특히 그것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던 도덕과 사회윤리의 차원에서 깊게 논의하는 것이 바라직할 것이다. 개인의 잘못은 물론 그 개인에게 어떤 벌이 가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냉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단 말이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실수는 용서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의 문제는 단순히 남녀간의 문제나 강약의 문제를 넘어 훨씬 더 깊은 우리 문화와 생활전통을 관통하여 흐르는 흐름을 어떻게 함께 돌리느냐 하는 문제로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단 말이다.

모든 사람은 성을 가진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생물학적 형태의 문제다. 그것 때문에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데 구별되어진 역할이 가끔 다르게 주어지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성 이전에 이미 사람이라는 보편가치를 가진다. 그것은 매우 고귀한 존엄이다. 그래서 성의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이러한 일들은 이제 철저하게 가정에서, 유치원에서부터 각종 학교에서, 종교집단에서부터 일상의 생활공간에서 성을 넘는 인권의 존엄함에 대해 깊이 논의됨으로 수정될 가능성이 있다.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의 실수는 개인의 잘잘못을 넘어 언제나 사회 전반의 흐름을 재조정할 것을 촉구하는 시대의 말씀으로 작용한다. 이번 논의는 그런 근본문제를 짚어 한 단계 상승된 사회가 되는 기회로 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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