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의 성생활
궁녀들의 은밀한 수련법은?
세종이 세자빈을 퇴출한 이유는?

조선시대 왕 성생활은 어땠을까...궁녀들의 은밀한 수련법은?

장옥정 사랑에 살다

 조선시대 왕은 본부인부터 첩인 후궁까지 많은 여인들을 거닐었다.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을것만 같은 조선 왕의 성생활은 어땠을까?

왕의 성생활은 1987년도에 발행된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기록되어 있다.

왕은 시대별로 차이는 있지만 마음대로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 했다. 당시 왕의 성관계는 쾌락보다는 왕자 생산에 목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에 왕은 원칙적으로 개인적인 취향이나 쾌락을 위해 잠자리를 갖는것이 금지 됐다.

규칙을 어긴다면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반성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장희빈과 인현왕후, 숙빈 최씨의 남편인 숙종은 "미인을 경계하십시오" 라는 상소를 받았다고 알려졌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

[왕의 잠자리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왕자 생산을 위했던 조선 왕의 잠자리는 특이하게 운세에 따라 결정됐다.

먼저 왕과 함께할 여인의 운세를 점치고 운세가 좋다면 왕자생산에 적합판정을 받고 잠자리를 가졌다. 이때, 운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왕이 누군가를 원하는가가 아닌 왕이 누우와 동침해야 왕자를 낳을 수 있냐는 것이다.

이 일을 담당하는 인물들은 대전 상궁으로 운세뿐만아니라 날짜와 시간까지 정한후 진행을 맡았다. 이에 당시 경제력이나 권세가 좋은 가문에서는 대전 상궁이 자기 딸의 운세를 좋게 봐줄 수 있도록 금전적,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왕의 상대가 정해지면 어린 궁녀들은 덮을 것, 깔 것, 벨 것이 각각 2벌씩 준비했으며 여름의 경우 모기장까지 준비됐다. 이부자리가 완성되면 머리맡에 물수건과 요강과 타구를 대령했다. 또 초 5개를 켜 너무 어둡지 않게 만들었다. 

동이

[전하 저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 숙직 상궁의 역할은?]

모든 준비가 완료된 후 왕과 여인이 방에 들어가면 상궁들을 제외한 궁녀들은 침실 근처에서 철수 한다. 대형 침실은 우물정(井)자 형태로 가운데 방에는 왕과 동침할 여인이 함께하고 주변에는 숙직 상궁들이 위치했다. 

침실 주변 방에 있는 상궁들은 왕의 성관계를 보좌한다. 특히 숙직상궁은 왕에게 조언을 하는 역할을 하며 보조했다. 이때 하는 조언은 왕이 너무 쾌락에 빠진듯하면 "옥체를 생각하시어 그만하십시오" 라며 제재를 하거나 "최적의 자세를 찾기 위해 옆으로 비트시어 진행하십시오" 등 개입을 했다. 심지어 "그만하시기를 청하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왕들의 성생활은 개인적인 일이 아닌 공식적인 행사로 왕들은 철저히 상궁의 말을 들었다. 다만 후궁으로 불리는 왕의 첩의 경우 비교적 성생활이 자유로웠다. 비교적 자유로웠음에도 잠자리를 가지기전 왕들의 어머니나 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 했으며, 여러가지 검사를 해야했다. 직접적인 개입은 없으나 문 밖에 항상 사람이 있었다.

이처럼 조선의 왕들은 강력한 왕권이 있음에도 성생활은 공식적인 행사처럼 여겨져 비교적 자유롭지 못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궁궐의 꽃 궁녀 그들은 누구?]

궁궐의 꽃 궁녀들은 왕족을 제외한 궁중 모든 여인들의 총칭으로 나인들과 무수리·각심이(방아이)·방자·의녀·손님이라 불리는 여인들이 범주에 든다. 그러나 보통 궁녀라 하면 상궁(尙宮)과 나인으로 분류되는 거대한 인구의 여인들을 의미한다.

궁녀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상궁나인이라 하여 상궁과 나인을 구분했다. 또한, 나인 아래에는 견습나인이 있는데, 이들은 아기나인 또는 생각시로 불린다. 보통 4세부터 계례(筓禮) 전인 17세 사이의 어린이 및 소녀 나인이다. 그리고 궁녀의 신분적 등급은 견습나인·나인·상궁의 세 종류로 나뉘며, 그 세 종류 가운데에서도 입궁 연조와 소속 부서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영화 간신

[왕과의 잠자리를 위한 훈련]

궁녀, 혹은 후궁들은 항상 잠자리를 위해 수련을 했다. 궁녀들은 성은을 입어 후궁이 되어 인생역전이 가능했으며 후궁이 된 이후에도 왕을 잡아두기 위해 여러가지를 수련했다.

특히 이 이야기는 영화 '간신'에서 자세히 다뤘다. 

1. 발 뒤꿈치 들고 걷기

궁녀들은 일상생활에서 일부러 발 뒤꿈치를 들고 걸으며 수련을 했다. 이는 종아리와 발목이 긴장돼 하체에 탄력이 생기고 곡선이 매끄러워 지기 때문이다.

2. 엉덩이 들고 걸레질

엉덩이를 들고 걸레질을 하면 유연성 뿐만아니라 매력어필이 가능했다. 

3. 연시 핥아먹기

이것은 손을 사용하지 않고 공중에 달린 연시를 핥아먹는 훈련이다. 이때 이를 절대 사용하지 않고 먹어야 한다.

 4. 얼음물 배꼽으로 받기

이 훈련은 잠자리가 아닌 임신을 위한 훈련으로 천장에 얼음을 매달고 배 위에 얉은 천을 올리고 얼음이 녹으면 떨어지는 물을 배꼽으로 정확히 받는 훈련이었다. 

5. 알몸으로 자기

조선의 궁녀들은 피부관리의 한 방법으로 항상 알몸으로 잠을 잤다. 실제로 알몸으로 수면시 피부가 충분히 쉴 수 있고 세포들이 재생하기 쉬워 효과가 있다.

천일야사

[소쌍과 순빈 봉씨의 동성애]

순빈 봉씨는 창녕 현감 봉려의 딸로 문종의 첫번째 부인인 휘빈 김씨를 내 쫓은 뒤 3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맞아들인 세자빈이었다. 그런데 순빈 봉씨는 결혼한 지 7년이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종은 그녀를 1436년 10월 26일 내쫓았다.

세종은 휘빈의 전례를 생각하여 다시는 문란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여사(女師)에게 열녀전을 가르치게 했다. 그런데 순빈은 이를 배운 지 며칠 만에 책을 뜰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것을 배운 후에 생활하겠는가4)” 하면서, 수업 받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세종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무례한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순빈은 궁궐 안에서 술을 즐겨 마시며 자유분방하게 생활했다. 실록에는 술을 즐겼던 봉씨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품이 술을 즐겨 항상 방 속에 술을 준비해 두고는, 큰 그릇으로 연거푸 술을 마시어 몹시 취하기를 좋아하였다. 혹 어떤 때는 시중드는 여종으로 하여금 업고 뜰 가운데로 다니게 하고, 혹 어떤 때는 술이 모자라면 사사로이 집에서 가져와서 마시기도 하였다. 또 좋은 음식물을 얻으면 시렁 속에 갈무리해 두고서는, 손수 그릇 속에 있는 것을 꺼내어서 먹고 다시 손수 이를 갈무리하니, 이것이 어찌 빈(嬪)이 마땅히 할 짓이겠는가. [세종실록]

부부의 사이가 멀어지고 후사가 없자, 세종은 후사를 잇기 위해 세 사람을 세자의 후궁으로 뽑아 들였다. 순빈은 이것을 시기하고 질투하였는데, 특히 후궁 중에 권 승휘(權承徽: 후의 현덕왕후)가 임신을 하게 되자 더욱 분개하고 원망했다. 이에 세종은 세자에게 “비록 여러 승휘가 있지마는, 어찌 적실 부인에게서 아들을 두는 것만큼 귀할 수가 있겠느냐. 적실을 물리쳐 멀리할 수는 없느니라.”하며, 순빈을 가까이 해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순빈은 투기 때문에 여러 번 궁인을 구타하기도 했는데, 어떤 때에는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할 정도로 폭력적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세자는 “내가 그를 총애한다면 투기하고 사나워져서, 비록 칼날이라도 또한 가리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그 뜻대로 된다면 옛날의 한나라 여후(呂后)라도 또한 능히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순빈의 경솔한 행동들은 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세자가 종학(宗學)에 옮겨 거처할 때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 사이로 외간 사람을 엿보았다거나, 궁궐 여종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것 등 세자빈의 자리에서 결코 모범적이지 못한 행동을 한 것 등이 문제로 지적됐으나 세종은 순빈 봉씨의 거친 성품과 그녀가 했던 가벼운 행동들을 어느 정도는 용인했다.

뿌리깊은나무

그러나 세종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괴이하고도 수치스러운 일이 발생하였다. 세자빈이 궁녀와 동성애에 빠졌다는 것이다. 동성애 스캔들은 결국 순빈 봉씨의 폐출로 이어졌다.

나머지 일은 모두 가벼우므로 만약 소쌍(召雙)의 사건만 아니면 비록 내버려두어도 좋겠지마는, 뒤에 소쌍의 사건을 듣고 난 후로는 내 뜻은 단연코 세자빈을 폐하고자 한다. 대개 총부(冢婦: 맏아들의 정실 아내)의 직책은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은데, 이러한 실덕(失德)이 있고서야 어찌 종사를 받들고, 한 나라에 국모의 의표(儀表)가 되겠는가. [세종실록]

순빈은 궁궐의 여종 소쌍(召雙)을 사랑하여 그녀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궁인들은 순빈이 소쌍과 항상 잠자리와 거처를 같이 한다고 수군거렸다. 이 소문을 들은 세자는 어느 날 궁궐 안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소쌍에게 “네가 정말 빈과 같이 자느냐”고 물었고 소쌍에게서 그렇게 했다는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다. 문종의 경고 이후에도 순빈은 소쌍이 잠시라도 곁을 떠나기만 하면 원망하고 성을 내었다.

심지어 순빈은 “나는 너를 매우 사랑하나, 너는 그다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소쌍은 다른 사람들에게 “빈께서 나를 사랑하기를 보통보다 매우 다르게 하므로, 나는 매우 무섭다”고 두려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또, 소쌍이 권 승휘의 사비(私婢)인 단지(端之)와 서로 좋아하여 함께 자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알게 된 봉씨는 사비 석가이(石加伊)를 시켜 항상 그 뒤를 따라 다니게 하여 단지와 함께 놀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소쌍에게 감시자까지 붙인 것이다.

순빈과 소쌍의 스캔들이 궁중에 파다하게 퍼지자, 세종은 부인과 함께 소쌍을 불러 그 진상을 물었다. 소쌍은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하고 사실을 토로하였다. 일반 사대부가의 부녀자로서도 감히 못할 행실을 저지른 순빈의 행태에 세종은 크게 분노했고, 결국 첫 번째 세자빈 휘빈에 이어 순빈도 폐출의 수순을 밟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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