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산티그마 광장과 국회의사당

그리스는 BC 12세기경 테베(Thebe)는 페니키아(Phœnicia)의 도시국가인 티로스(Tyros)의 왕자 카드모스(Kadmos)가 최초로 테베(Thebe)를 건설하고, 이후 테베에서 아테네·스파르타 등 많은 도시국가가 파생되었다고 한다. BC 800년경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한 아테네는 전설에 의하면, 사람의 얼굴에 하반신은 물고기인 인어 케크롭스(Cecrops)가 다스렸다고 한다.

그런데, 아테네 여신과 포세이돈이 이 도시를 서로 욕심내면서 포세이돈은 말(馬)을, 아테나는 올리브나무를 제시하여 결국 아테나 여신이 차지하게 되었고, 이후 도시는 ’수호신 아테나의 도시‘라 하여 아테나이(Athenai)라고 불렀다. 참고로 아테나 여신은 전쟁의 신이지만, 아레스(Ares)처럼 폭력이나 유혈을 마다하지 않는 호전적인 전쟁의 신이 아니라 오로지 방어적인 전쟁의 신이었다.

아테나 여신(아테네 대학)
아테네대학
아테네대학 전경
아테네국립도서관
아테네국립도서관 내부

BC 6세기 말 아테네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민주정치를 시행했고, BC 5세기 초 아시아의 대제국 페르시아와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 후에는 더욱 발달했다. 즉,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비하여 연안 국가들을 끌어들여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의 중심국이 된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절정에 올랐으나, BC 313년경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BC 356~BC 323)에게 정복당했다. BC 134년 로마의 속주가 되고, 또 1453년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는 등 2000년 이상 나라를 잃고 살았다.

2000년 이상 식민통치를 받아오던 그리스인들은 수차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다가 1789년 프랑스혁명에 크게 고무되어 1821년 대대적인 독립전쟁을 벌였다. 10년 이상 계속된 독립운동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3대 강국이 지원하고 유럽의 수많은 귀족이 지원금을 보내고 예술인들이 참전하여 목숨을 잃은 끝에 1832년 비로소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는데, 오랜 역사를 간직해온 아테네를 수도로 정했다. 오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테네는 독일 '바이에른 궁'을 건축한 '칼토너'의 설계로 고대 그리스 건축양식인 신고전주의로 왕궁을 지었는데, 이후 그리스에는 신고전주의 열풍이 불어 아테네 그리스국립도서관, 아테네학술원, 아테네대학교를 ‘아테네의 신고전 3대 걸작’이라고 한다.

열강은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1세의 둘째 왕자인 17살의 오토(Otto: 1815~1867)를 초대 그리스 왕으로 옹립했지만, 그는 게르만족으로서 그리스인의 정서를 대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정교로 개종도 거부하여 그리스인들의 반발을 받았다. 결국, 즉위한 지 30년만인 1862년 10월 오토왕이 거센 저항을 받고 퇴위하자, 이듬해 3월 열강 3국은 다시 덴마크계 크리스티안 빌헬름 페르디난트 아돌프 게오르그(Christian Vilhelm Ferdinand Adolf Georg af Slesvig-Holsten·Sønderborg- Glucksborg: 1845~1913)를 새 왕으로 추대했다.

그의 긴 이름 중 ‘게오르그’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게오르기오스 또는 요르요스라고 하는데, 17살의 새 국왕 요르요스 1세는 오토왕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모국어인 덴마크어 대신 그리스어를 익혔고, 덴마크의 국교인 루터교도에서 그리스정교로 개종했다. 그리고 입헌군주제를 시작했다.

1934년부터 왕궁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아테네에서 시내 관광 출발지는 국회의사당, 고급 호텔과 카페들이 밀집해있는 신타그마(Syntagma) 광장이다. 신타그마란 그리스어로 ‘헌법’이란 의미인데, 1843년 이곳에서 최초로 근대 헌법이 선포된 이후 붙여진 지명이다. 신타그마 광장 부근에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국립고고학박물관, 비잔틴 박물관 등이 있고, 또 아테네대학교, 아테네아카데미, 아테네 국립도서관 등 학술기관이 있다. 이곳에서 파르테논 신전, 니케 신전 등이 있는 아크로폴리스까지 도보로 30분이면 갈 수 있다.

국회의사당 앞에는 오스만튀르크의 통치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했던 희생자들을 비롯하여 1, 2차 대전 때 희생자, 그리고 6.25 참전에 희생된 무명용사들의 비명이 새겨있다. 무명용사 비의 중앙에는 전사한 병사의 부조물과 그 양쪽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Thucydides)의 명언이 오른쪽에는 그리스어로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 왼쪽에는 '누워 있는 용사를 위해 빈 침대가 오고 있다'라고 라틴어로 씌어있다. 로마 베네치아 광장에 1863년 이탈리아를 통일한 에마뉘엘 황제 기마상과 무명용사 탑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영웅광장에 건국 영웅들의 조각상을 세운 것처럼 나라의 독립 영웅들을 추모하는 마음은 같지만, 이곳에는 영웅의 동상은 없다.

그런데, 매시 정각에 국회를 경비하는 대통령 근위대 소속 병사들이 무명용사비 앞에서 교대식이 벌이는데, 영국 버킹엄궁, 대만 중경 기념 당의 근위병 교대식을 생각하면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다. 빨간 베레모에 화려한 금박자수가 박힌 조끼와 주름 잡힌 치마, 검은색 방울이 달린 신발을 신은 병사들을 ‘에브조니(Evzone)라고 하는데, 에브조니란 오스만튀르크의 지배 당시 산악 게릴라의 이름이라고 한다. 병사들의 복장도 당시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뒤뚱거리는 신발과 동작이 코미디 같다.

아테네 학술원(Academia)은 덴마크 출신 크리스티안 한센(Christian Hansen)이 1859년 착공하여 1885년 완공했는데, 철학자 플라톤(Plato)이 이곳에 아카데미아를 만든 것에서 유래한다. 아카데미아는 오늘날 학문연구기관의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는 어원이 되기도 했는데, 아카데미아 입구 양쪽에는 그리스 철학과 학문을 대표하는 소크라테스(왼쪽), 플라톤 석상(오른쪽)이 있다.

계단에 올라서면 이오니아식 대리석 건물인 학술원 앞에 왼편에 전쟁과 지혜의 신 아테나가 방패와 창을 들고, 오른쪽에는 태양과 음악의 신 아폴론이 하프를 들고 있는 입상이 높이 솟아 있다. 유럽에서는 영웅이나 위인들을 가령,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있는 트래펄가 광장에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친 넬슨 제독의 동상을 높은 기단 위에 세워 두어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아테네에서는 그보다는 낮긴 해도 약간 높이 세운 것 같다. 누군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했듯이 숱한 그림 중 ’소크라테스의 강연‘ 그림이 가장 눈에 띄었다.

아카데미 전경
아카데미
아카데미 소크라테스(좌), 플라톤(우)
아카데미의 아테네 여신과 아폴론 상

아카데미 왼쪽에 있는 상아색(Ivory) 2층 건물인 아테네대학은 그리스독립 후 1837년 오토 왕이 설립한 그리스 최초의 대학이다. 덴마크 출신 건축가 크리스티안 한센이 1864년 완성한 대학은 대문과 담장이 없이 이오니아식 대리석 기둥이 길게 늘어선 행랑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예술적이다. 구내에는 아테네 여신의 동상이 있다, 아테네대학의 왼쪽에 있는 아테네 국립도서관도 1887년 덴마크 출신 건축가 크리스티안 한센 형제가 도리아식인 헤파이토스 신전을 모방하여 15년 만에 완성한 건물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인 건물 양쪽에 날개 모양의 곡선으로 만든 계단으로 출입하게 설계된 것은 요즘에는 흔한 모습이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었다고 한다.

도서관 계단 밑에는 당시 그리스 대부호로서 도서관 건립에 많은 기부금을 낸 파나기스 아타나시우스 발리아노스(Panaghis Athanassiou Valli anus)의 동상이 있다. 도서관에는 1400년 전 그리스어로 쓴 신약성서 필사본 4500여 권을 비롯하여 진귀한 고문서 등 100만 권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는데, 바티칸박물관·대영박물관 등 유럽의 도서관의 고문서들은 튼튼한 가죽 표지와 견고한 제본 등이 끈으로 네 번 구멍을 뚫어 묶은 우리의 고문서들과 좋은 비교가 된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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