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대전민예총 이사장

‘여름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라고 하니 여간한 일이 아니면 친척이라도 찾아가기가 조심스러운 요즈음이다. 더구나 코로나19 상황에선 더 마음이 쓰인다. 부모님 기일처럼 꼭 가족이 모여야 하는 경우도 먼저 가족들의 의견을 묻는다. 얼마 전 서울의 한 할아버지가 집안 제사로 고향을 찾았다가 친척들에게 코로나19를 감염시킨 일도 있으니 더욱 망설여진다.

게다가 기습 폭우가 전국을 오르내리는 장마철이니 마음을 정하기가 쉽지 않다. 서울 처남집에서 장모님 제사를 지낸 뒤 다음날 곧바로 내려오기로 했지만, 출발하는 날 비가 많이 내리면 못 가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맏이인 아내는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텃밭에서 가꾼 토마토와 옥수수, 동생들이 좋아하는 동치미와 깻잎김치 등을 주섬주섬 챙기는 모습이, 모처럼 동생들과 만나는 게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일요일 새벽길은 막히지 않을 것이라며 집을 나서 천안을 지나는데, 라디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다. 마침 세계 역사 이야기를 하는 방송이었는데 영국의 공포 영화 얘기다. ‘폭우로 앞도 안 보이는데 공포 영화까지’ 하며 채널을 바꾸려는데, 초대 손님이 영국사에 정통한 친구 영석이었다. 영석이 목소리는 알았을 텐데 빗소리에 뒤섞여 얼른 알아채지 못했다.

일찍 길을 나선 덕에 올림픽대로를 막힘없이 지나 처남집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처남댁은 시어머니 제사 음식 준비로 아침부터 분주한데, 싹싹하게 엄마를 돕는 큰조카는 지방 출장으로 오지 못했다. 아쉽지만 아내와 처남댁, 막내 조카가 기름 냄새를 풍기며 전도 부치고 떡도 빚으니 제삿날이 실감났다. 저녁에 처제들이 함께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추억하다가 자정에야 잠자리에 드는데, 폭우에 강풍까지 겹쳐 월요일 새벽 일찍 출발해야 길이 막히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 새벽 가는 빗줄기 속에 길을 나섰는데 차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한참 지나 겨우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내비게이션이 교통 상황에 맞춰 낯선 지름길로 안내하는데, 아산을 지날 때 빗줄기가 굵어지다가 정안 나들목으로 접어드니 비가 그쳤다. 세종은 길이 말라 있고 바람도 고요해 마음이 편안해졌다. 역시 내 집이 최고임을 실감하면서 무더위에 손님맞이로 애쓴 처남댁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안타깝게도 이날 오후에 천안·아산에 큰 수해가 났다.

지금껏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코로나19로 일상이 확 바뀌었는데 두 달 가까이 계속되는 장마에 엄청난 폭우까지 겪게 되니, 이 모든 일이 우연은 아닌 듯하다. 이번의 지독한 장마와 폭우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 그리고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겪는 기상 이변이다. 그런가 하면 먼 서쪽 스페인은 40도가 넘는 폭염으로 사람들이 죽어갈 정도라고 하니 지구 전체가 몸살을 앓는 셈이다. 우리가 지금 겪는 극단적인 장마는 북극과 동시베리아, 서태평양의 고온으로 인해 대륙의 차고 건조한 공기와 태평양의 무덥고 습한 공기가 부딪쳐 장기간에 걸쳐 무지막지한 물 폭탄을 동반하게 된 것이라 한다.

결국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지구 온난화에서 비롯된 기후 변화가 이런 극단적 기상 이변을 가져온 것이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는 이제 기상학자나 생태학자들의 조바심 어린 경고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일상이 됐다. 지구의 자기조절시스템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우리가 눈부신 산업화로 이룬 엄청난 풍요와 편리함이 가져온 대가라 할 수 있으니, 이제라도 우리 삶의 태도를 되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겪는 전염병 창궐이나 기상 이변 등 각종 재난은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정점에서 치러야 하는 구조적 위험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산업화 속도 완화가 미세먼지 발생을 줄여주고, 마스크와 사회적 거리 두기 생활화로 감기나 기관지염이 획기적으로 줄었음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도성장 위주의 개발 정책과 자본의 무한 축적을 추구하는 탐욕이 가져온 위험의 가속화에 대해 차분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제어력 확보, 자본의 무한 탐욕에 대한 합리적인 대안 담론이 절실하다. 이것이 바로 위험사회에서 살아가는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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