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아마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충북 옥천군 청성면 계산리에 있는 전통놀이공원 ‘아자학교’에 대하여 듣고 알고 그곳에 다녀왔을 것이다. 나는 지난 두 주 전에 거기에 다녀왔다. 전기를 쓰지 않는 전통놀이기구 26개를 만들어, 사람들이, 특히 어린이들이 직접 자신들의 힘으로 놀이기구를 잘 움직여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우리나라 놀이공원들이 약 6만 개가 넘지만, 오직 여기만 전력을 쓰지 않는, 재래식 놀이기구를 만들어 세웠다는 것이다. ‘아자쌤’이라고 흔히 알려진 고갑준 선생이 25~26년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우리 고유한 놀이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고 선생은 공부와 노동운동과 사회활동을 하면서 우리사회가 오래도록 안고 있는 고쳐지지 않는 병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디를 가나,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람들 사이에 서로 돕고 협조하고 화합하는 것이 없는, 아주 살벌하기 짝이 없는 못된 사회를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마음에 매우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이 살벌한 세상을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심하였다. 그러면서 ‘좋은 놀이’가 사라진 우리사회의 삭막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건강한 놀이가 무엇인지를 찾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그는 우리사회에는 상당히 탁월한 아름답고 거룩한 공동체놀이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놀이가 일상화하면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지나치게 살벌한 사회,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면서 서로 돕고 사는 사회가 아니라, 나 혼자만이 이기고 성공하여 잘 살겠다는 천박한 생존경쟁사회가 어디에서부터 오고 시작되었을까? 그것을 그는 깊이 고민하고 따져보았다. 언제부터 우리의 공부는 경쟁하여 이웃에 있는 동무를 꺼꾸러뜨리고 나 혼자만이 우뚝 서는 것이 잘 하는 일이라고 배우고 인정되게 되었을까? 사촌이나 이웃이 땅을 사면 배앓이를 한다는 속담이 언제부터 퍼지기 시작하였을까? 그렇게 하여 이른바 성공하였다고 하여도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고 끝없는 경쟁의 톱니바퀴에 휘말려 찌들린 얼굴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졌을 때는 이기고 싶어서 발버둥치고, 이겼을 때는 그것을 남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하여 온갖 힘을 쏟아야 하는 노예의 삶을 누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게 굴러가는 수레바퀴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들어 함께 굴러가야 비로소 생존이 가능하다고 느끼는 이 사회생활을 누가 즐거운 삶이라고 느끼면서 살까?

정의로운 사회가 좋은 사회지만, 그보다 더 깊고 거룩한 사회는 깔깔 웃고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일 것이라는 것을 그는 느낀다. 그는 그것은 바로 자기의 힘과 동무의 힘을 함께 합해서 굴러가는 놀이를 통하여 훈련하고 버릇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건강한 놀이요, 그 놀이를 통하여 어린이나 어른의 사회가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요사이 상당히 많은 곳에서는 함께 놀 동무가 없어서 고민이다. 이러한 때는 누구인가 맘에 조금 들지 않는다고 따돌리고, 그와 깜비가 되어 적대시하면서 살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내가 놀 수가 없기 때문이다.

건강한 놀이란, 결국 다른 동무와 함께 힘을 써서 노는 놀이다. 널을 뛰어도 짝이 없으면 안 되고, 전력을 쓰지 않는 균형잡힌 바이킹같은 놀이기구도 양쪽으로 나누어 힘을 주고받을 동무가 없으면 안 되며, 네 사람이 함께 타는 씨이소 역시 서로 힘을 잘 배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놀이가 있다. 이 때는 내 힘으로 놀이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쪽 동무의 힘으로 내가 즐긴다. 고무줄놀이도 함께 하는 것이요, 공기놀이도 같이 해야 재미가 붙는다.

이런 놀이를 학교에서 학생들이 즐기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학교에서는 오로지 공부만을 강조한다. 신나고 좋은 놀이가 교육과정에 얼마나 깊게 배정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놀이를 교과과정으로 하면 ‘놀이’가 아니라, ‘놀이교육’이 될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어린이들이 놀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요사이는 오로지 공부다. 학교에서도, 방과후학급에서도, 학원에서도, 또 집에서도 공부뿐이다. 어디에도 놀이가 중요한 시간으로 차지하는 곳이 없다. 가만히 생각하면, 가끔 모둠공부가 있긴 하지만, 대개의 공부에서는 함께 하는 덕목을 쌓기가 쉽지가 않다. 대개의 놀이는 함께 하는 것이다. 가끔 내기놀이를 하지만, 그것도 동무가 없으면 안 된다.

함께 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Being)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존재(Inter-Being)임을 증명하는 데서 나타난다. ‘너가 없으면 내가 없다’는 철학에서 시작되는 덕스러운 존재, 그것은 바로 건강한 놀이에서 증명이 된다.
놀이가 건강하면, 모든 것을 한 판 신나는 놀이로 놀 수 있을 것이다. 연극도 진짜로 하면 사람을 죽이고 전쟁이 될 수 있지만, 전쟁도 놀이로 하면 한 판 재미나는 일이 될 것이다. 요사이 정치판도 이것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번갈아 노는 놀이라 생각한다면, 지금과 같은 더러운 정치판은 사라지고 즐거운 놀이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도, 경제도, 시장도, 군사도, 나라 경영과 국제관계도 한 판 놀이처럼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놀이판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삶이 한 판 놀이라고 여기면서 슬슬 즐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덕스러운 존재’(Inter-Being)들이 어울려 놀아보는 사회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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