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아펜젤러는 의사였고 아름다우며 지성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이제 갓 결혼하고는 그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기도했다. 그렇게 서럽고 외로운 자를 도우라는 주님의 뜻을 따라 조선으로 건너왔다.

아무것도 없는 허름한 초가에서 교회 터를 잡았다. 그러나 조선 사람은 너무나 가난했다.

이 가난을 끊어 주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선교사는 배재학당을 만들어 가르쳤다. 때문에 정동교회는 성전이라기보다 학교에 가까웠다.

서울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남쪽으로 전도를 떠나기로 했다. 모두가 말렸지만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목포는 그때나 지금이나 짙은 안개가 문제였다. 배는 어둠 속에서 암초를 피해 운행하다가 일본 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고교시절 수영 선수였던 아펜젤러는 쉽게 배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함께 출발했던 정신여학교 여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학생을 구하려고 다시 뛰어들었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겨우 40살이었다.

조선에서 태어난 딸과 아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곧 미국으로 돌아갔고 주님의 일을 하러 떠난 아버지를 왜 주님이 데려가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물로 시간을 죽여가던 그때 기적이 시작됐다. 아펜젤러의 순교는 미국에 전해졌고 수많은 청년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렇게 조선으로 향한 선교사는 수십 명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밀알이 돼 수백 명의 아펜젤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목숨보다 사랑했던 조선에 던져준 선물이었다. 뒤늦게나마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아들과 딸은 조선으로 돌아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을 이어갔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

양화진 언덕에 가면 아펜젤러 가족의 무덤이 있다. 한강을 보며 가족은 아버지 아펜젤러는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 땅에 개신교가 이렇게 들어왔다. 가장 낮은 곳에서 빛과 소금이 돼 밝히고 살렸다. 선교사들이 진정으로 바라던 당당하게 홀로서는 조선은 이제 가능해졌으나 개신교는 어떻게 됐는가? 그들이 뿌린 5300교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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