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아테네 국립 고고학박물관
아테네 국립 고고학박물관
이집트 벽화

인류문명은 BC 5000년경 이집트·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처음 발생하여 지중해를 건너 크레타섬과 키클라데스 제도를 거쳐 그리스 본토에 상륙하여 꽃을 피웠는데, 로마로 이어져 세계 문명의 원류가 된 그리스 문명은 크게 BC 3300~BC 2000년경 에게해의 30여 개 섬인 키클라데스 제도(諸島)에서 형성된 키클라데스 문명, BC 3650~BC 1170년경 크레타섬의 미노스 문명, BC 1600~BC 1100년경 그리스 본토 미케네에서 발달한 미케네 문명 등 셋으로 나눈다. (7월 8일 자 그리스의 개요 참조)

아테네는 BC 8세기에 왕정시대, 귀족정치, 참주정치를 거쳐 BC 6세기에는 최초로 민주정치를 시행했는데, BC 5세기에 3차에 걸친 이민족인 소아시아의 페르시아 침략을 물리친 페리클레스 시대에 최고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융성하던 그리스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다툼으로 국력이 쇠약해지더니, BC 313년경 발칸반도의 북부에 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망했다. 유럽·아시아·아프리카의 삼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문화를 융합시켜 새로운 헬레니즘(Hellenism)을 탄생시켰으며, 그 후 로마제국이 그리스를 점령하여 그리스의 문화 예술은 로마로 옮겨갔다. 이렇게 그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당한 이래 1차대전으로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나라를 잃은 기간이 2000년이 넘는데, 그 사이에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외국에 탈당하고 말았다.

7실 쿠로스상
15실 제우스 또 포세이돈
30실 헤라클레스

오랫동안 이민족의 식민통치를 받아온 그리스인들은 수차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다가 1789년 프랑스혁명에 크게 고무되어 1821년 대대적인 독립전쟁을 벌였다. 10년 이상 계속된 독립운동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3대 강국의 지원으로 1832년 비로소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이후 그리스는 영국·프랑스 등에 빼앗기고 잃어버린 유물의 반환을 촉구하고 있지만, 응답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빼앗기고 약탈당한 우리 문화재의 반환 요구에 일제가 보이는 반응과도 비슷하다.

아테네 국립 고고학박물관에서는 크레타섬에서 이룩한 크레타 유물과 트로이 유물에서 로마의 비잔틴 시대인 4세기 초까지의 유물만 전시하고 있다. 그것은 아테네는 물론 크레타섬, 낙소스섬을 비롯하여 코린토스, 델포이, 테베, 올림피아, 테르모필레, 메테오라 등 전국 곳곳에 유적과 유물이 즐비할 뿐만 아니라 도시마다 박물관이 널브러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국내외 여행을 할 때면 국공립박물관은 물론 사설박물관도 자주 찾아가는데, 특히 외국 여행을 갈 때는 현지의 문화와 유적들을 직접 살펴보거나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서 가급적 박물관을 자주 찾는다. 박물관은 시간과 비용을 크게 절약하면서도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빨리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벽화 권투 모습
부조물 레슬링

아테네 고고학박물관은 국회의사당이 있는 신타그마 광장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지만, 지하철을 타더라도 오모니아역에서 내린 뒤 약 700m쯤 걸어가야 하므로 신타그마 광장에서 시내 관광을 하며 걷는 것도 좋다. (8월 5일 자 신타그마 광장 참조)

아테네 고고학박물관 건물은 그리스 독립 후 오토왕 때인 1869년 건축가 랑케(Ludwig Lange)에 의해서 지어졌다. 이오니아식의 기둥 8개로 현관을 만들고, 그 양쪽으로는 열주 회랑을 만든 신고전주의 양식의 박물관은 늘어나는 유물을 보관하기 위하여 1932년부터 1939년 사이에 2층을 증축했다. 박물관 입장료는 성인 6유로, 학생 3유로이다. 입장객은 일체의 소지품을 갖고 들어갈 수 없고, 입구에서 가방이나 짐을 맡긴 뒤 박물관을 나올 때 짐을 돌려받아야 한다.

크레타 자기
크레타 청동그릇

박물관은 1층에 48개 전시실, 2층에 8개 전시실 등 모두 56개 전시실이 있는데, 1층은 선사시대부터 청동기 시대, 이집트 유물 전시실이고, 2층은 산토리니섬에서 발굴된 벽화를 비롯하여 항아리와 도자기 전시실이다. 그런데, 여행객이 짧은 시간에 모두 돌아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미리 관심 있는 유물과 전시실을 미리 정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그렇게 범위를 좁혔는데도 워낙 많은 전시물을 짧은 시간에 보고 나면, 기억은 뒤죽박죽이 되고 찍은 사진을 보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은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 바티칸박물관, 대만 고궁박물관 등을 관람하면서 겪었던 일이기도 하다.

BC 3000년경에 찬란했던 지중해의 크레타섬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3~6실은 조각상과 부조물 대부분은 독일 고고학자인 슐리만(1822∼1890)이 발굴한 유물들이다. 크레타 문명은 지중해를 통하여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지만 그중 BC 16세기 작품이라고 하는 4전시실의 ‘아가멤논의 황금 데스마스크(Death mask)’는 슐리만이 발굴하여 이름 붙였으나 훗날 아가멤논의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는데도 ’아가멤논의 마스크’라는 고유명사로 굳어질 정도이다. 아가멤논은 미케네 왕으로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Paris)가 스파르타 왕 멜레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유혹하여 달아나자 연합군을 결성하여 트로이 공격에 나선 트로이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다.(크레타 문명에 관하여는 7월 8일 자 그리스 개요 참조)

BC 16세기 이후 그리스 문명은 크레타를 대신하여 본토의 미케네로 옮겨졌는데, 미케네는 지중해 연안의 각 지역과 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미케네의 6개의 수혈 분묘에서 발굴된 황금 마스크는 동서고금의 인류가 황금을 선호했다는 사실과 함께 컵, 접시, 보석 등에서 당시 정밀한 세공기술을 알 수 있다.

특히 꽃병 등 지중해의 여러 섬에서 발견된 자기의 크기, 색상, 자기에 새긴 그림들은 바티칸박물관, 북경 자금성, 대만 고궁박물관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고려자기·조선백자의 크기나 색상 등에 대한 우리의 자부심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해준다. 최근에는 에게해의 선사시대 유적인 아크로티리(Akrotiri)에서 발굴된 '봄(The Spring)'이라는 프레스코화(Fresco)도 BC 16세기 작품인데, 봄은 산토리 섬의 옛 지명인 티라(Thera)의 화산암과 빨간 백합, 공중을 나는 제비들을 잘 묘사하고 있다. 사실 구체적인 기법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BC 5세기 이래 중국·한국·일본의 불교 벽화 대부분도 프레스코화의 일종이다. (프레스코화에 관하여는 7월 8일 자 그리스 개요 참조)

티라섬의 벽화 봄

7전시실에는 쿠로스(Kouros: 남)와 콜레(Kore: 여)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 남녀 조각 입상(立像)들이 많다. BC 650~BC 480년경 아카익 시대(Archaic)에 제작된 나체상들은 정면을 바라보면서 왼쪽 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고, 두 주먹을 가볍게 쥐고 차렷 자세를 하면서 입가에 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어서 ‘아카익 미소(Archaic smile)’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데, 이 조각상들은 그리스가 지중해를 통하여 이집트와 교류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미케네 아카메논 황금가면
미케네 황금장식

초기에는 한발을 앞으로 내놓고 뻣뻣하게 선 모습이었다가 점점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팔과 다리 모습으로 토착화되었는데, 아카익 시대의 쿠로스 상들은 그리스의 다른 박물관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인들과 달리 이런 조각상을 묘석이나 기념표시로 많이 만들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1928년 수니온의 포세이돈 신전에서 발굴된 거대한 포세이돈입상이다. 15전시실에 있는 포세이돈 청동나체상은 에비아섬의 아르테미스 신전 해저에서 발굴된 것으로서 삼지창을 던지는 포세이돈이라느니, 번개를 던지려고 하는 제우스라는 등 설이 분분하여 ‘제우스 혹은 포세이돈’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것도 눈길을 끈다. 학자들은 이처럼 조각상과 그림들을 통해서 그리스의 신과 영웅, 우주관을 연구하고, 또 그리스신화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을 탐구하고 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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