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슬하의 자식이란 표현이 무색하게 아이들의 몸집이 필자를 능가한 지 오래다. 하지만 아이들이 읽은 책 내용을 정리하거나 흥밋거리를 이야기할 때면 주제를 쫓기 힘든 경우가 많다. 조심하려 해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는 말이 툭 튀어나온다. ‘이제 아빠랑 말 안 해’라는 반응과 함께 조언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버린다. 내리사랑이 자리하고 있는 부녀간에도 어려운 것이 조언인데, 동료 연구자 간에 조언을 주고받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

조언은 연구자 간의 친밀도나 전달되는 말에 깔린 책임감의 정도에 따라서 멘토링, 컨설팅, 충고, 참견 혹은 훈수두기로 달리 불릴 수 있고, 연구팀에서 빈번하게 진행되는 토론 역시도 집단 조언이라 할 수 있다.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기 위한 교육과정에서 대학원생은 지도교수를 포함한 다수의 멘토로부터 조언을 받는다. 이후에도 ‘나홀로 연구’가 종언을 고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조언 주고받기 혹은 연구활동에서의 상호작용은 더없이 필요하게 되었다. 필자와 같이 10여 년을 끌어오던 학위과정의 주제를 떨치고, 새롭게 연구주제를 변경한 연구자에게 선험자들이 들려주는 조언은 매우 중요하다.

일상의 조언과 달리 과학기술 분야의 조언이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차갑다는 것이다. 애정을 둔 조언이라도 차가움이 지나쳐 냉소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연구자의 입에서마저 차가운 조언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기술 분야 논문 게재가 동료심사와 평가(peer review) 과정을 거치는 데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유명 과학저널들은 논문의 질적 우수성과 파급력을 높이기 위해 논문심사 과정에서 게재거절(reject)의 수효를 늘리는 방법을 택한다.

이러한 적대적 심사과정을 다수 겪어 본 연구자들은 동료 혹은 후배 연구자들에게 에두른 표현 대신에 독설에 가까운 조언을 쏟아낸다. 조언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지금 겪고 변화하지 않으면 결국 심사과정에서 혹독히 대가를 치르게 된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언은 받아들이는 연구자에게 심각한 심리적 저항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 중고생인 아이들도 자존심이 상한다고 느낄진데, 사고의 유연성이 한참 떨어진 나이라면 자존심은 유리알과 같아서 너무 쉽게 다칠 수도 있다. 그러나 몹쓸 자존심보다는 자존감을 높이고, 조언을 듣고 보다 성장하겠다는 생각이 깊으면 신랄한 조언일지라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연구주제를 바꾼 필자에게 여전히 이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익숙지 않고, 실험이나 세부 결과 토론에 있어서 표현이 깔끔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어김없이 팀 내 동료들의 반응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이다. 거북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성장 욕구가 커짐에 따라 차가운 조언에 대한 반응도 달라진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설명이 깔끔하지 못했네’라고 인정하고 표현을 다시 정리하고자 하면, 감정적 이슈로 틀어지곤 했던 토론이, 전보다 열띠게 이어지곤 한다. 이런 측면에서 동료들의 혹독한 반응은 연구자가 현실을 돌아보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동인이 된다.

연구팀 내에서 일어나는 대다수의 조언은 애정이 있고 악의적이지 않다. 그 마음에 걸맞은 따스함이 직설적인 조언에도 묻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받아들이는 쪽에서도 순간적인 반감으로 좋은 조언들과 이를 통해 변화할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침잠해야 한다. 호의적일 리 없고, 나이를 포함해서 우리의 사정을 봐줄 리 없는 논문심사자들의 집요한 공격에 맞서려면, 평상시에 팀 동료들로부터 조언 주고받기라는 좋은 백신 처방을 받는 것은 어떨까? 이를 통해서 세계적인 연구자들과 일합을 겨루는 전장에서 살아남는 승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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