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 생명은 없을 것이다. 자유는 혼자 산다면 전혀 필요 없는 것이리라. 다른 것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할 때, 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때 사람은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고 추구한다. 생명의 속성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시대에는 국가나 어떤 집단의 존속을 위하여 그에 속한 개인의 자유를 상당한 기간 유보할 때도 있었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위기상황이나 심각한 전쟁상황에서 때때로 그러하였다. 물론 독재체제에서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자유를 제한한 것은 너무 사례가 많다. 나는 한 생명은 때때로 국가보다, 천하보다 더 크고 귀하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위하여 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강하게 아나키스트로 살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이 혼자 살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존재라고 할 때 갈등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하여 법률로 정하고, 그 집단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부여한다. 이것들은 곧 자유의 제한을 말한다. 어느 한 개인이 합의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이렇게 이루어질 때가 많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순스럽게도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사회체계 속에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과 사회는 갈등하고 조화하며, 자유와 의무 역시 모순 구조 속에 존속한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완벽하게 조화하여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선에서 적당히 결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때때로 참 기분 나쁜 일이기도 하다. 자기의 철학이나 양심과 다른 결정을 해야 하기에 매우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나는 요사이 오래 전에나 듣던 말들, ‘종교자유’라거나 ‘생명보다 귀한 예배’란 말을 새삼스럽게 듣고 생각을 모아보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이 새로 확산되면서, 행정당국은 매우 강하게 종교들이 항상 가지던 집단 예배, 예불, 미사를 자제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명령성 부탁 또는 부탁성 명령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된 데는 공교롭게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감염사례들이 좁은 공간에서 여러 사람들이 오래도록 모여 공동으로 종교행사를 하는 데서 많이 나타났고 지금도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상당한 기간 서로 거리를 두면서 직접 접촉을 피하자는 요청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자유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거부하였을 때 부작용이 나타난다면 그 책임에서는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문제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종교자유와 예배라는 것을 조금 내 식으로 정리하고 싶다.

엄밀히 따져서 종교를 가지는 것과 가지지 않는 것은 개인의 문제다. 그것을 제한하는 것, 금지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제한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국교란 종교자유를 억압하는 일이다. 학교에서 가정에서 어떤 단체에서 특정한 종교를 가지거나 가지지 말라는 것을 강요할 때가 있다. 이것은 선교의 차원을 떠나 종교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다. 어느 종교집단에서는 다른 종교로 믿음을 바꾸려는 것을 여러 방법으로 강력히 막는다. 이것은 종교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다. 종교의 선택은 개인 양심의 문제요 맘과 정신의 문제이지, 종교집단이 관여할 일은 아니다. 내가 믿는 종교만이 유일한 것이요 다른 것은 망할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여 자유롭게 선택하려는 것을 막는 것은 종교선택의 자유, 즉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다. 이번 정부에서 각 종교에 단체로 모이는 것을 자제하여 달라는 요청은 종교를 믿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본다. 문제는 예배를 금하기 때문에 종교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내가 이해하기로 예배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 단체로 하는 예배예식행위를 잠깐 자제하여 달라는 요청이다.

함께 모여서 하는 예식행위가 곧 예배는 아니다. 예배는 내가 믿는 신에게 내 자신을 드리는 일이다. 내 일상생활이 곧 예배란 뜻이다. 예배 따로 생활 따로가 아니라, 생활이 예배요, 예배가 생활이 되게 하라는 것이 산 예배다. 성소라는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내 속에도, 밖에도, 거리에도, 산에도, 직장에도, 가정에도 있는 신에게 고스란히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치라는 것이다. 종교들은 항상 그렇게 가르쳐왔다. 그러면서도 어느 특정한 장소에, ‘거룩하고 성스럽다고 정한 곳’에만 마치 신이 계신 것처럼 착각하게 가르치고, 그것을 믿도록 습관화시켰다. 좀 세게 말하면 일종의 우상을 참 신으로 바꿔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집단으로 드리는 것이 예배는 아니란 말이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다. 개인은 허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정서상 집단의 분위기나 힘을 빌려서 나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집단 예배는 일종의 잔치다. 각자 자기가 만든 것을 가지고 와서 한 자리에 내어 놓고 서로 감동하고 은혜를 받는 잔치다. 거기에 가지고 오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가 일상에서 드린 생활 자체다. 이런 것은 매우 다양한 모양으로 상황에 따라서 여유 있게 할 수 있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종교’라는, ‘예배’라는 우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겉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비추는 빛을 따라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는 개인과 사회, 자유와 제한의 문제는 집단의 것이 아니라 성숙한 개인이 조화할 문제다. 종교의 자유나 예배의 자유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함께 사는 사람들이 서로 협조하는 모습을 만들어나가는 문제다. 때때로 집단 양심이나 이성은 없고, 집단 감정과 이해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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