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사람들

[금강일보] 따옴표도 없이 문단으로만 되어 있는 문장 앞에서 눈먼 자가 된 듯 어지러웠다. 하지만 서서히 문장이 익으면서 몰입할 수 있었다. 눈먼 세상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방법이 있을까. 눈먼 사람들 가운데 신출귀몰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바로 의사의 부인. 그녀는 눈이 멀지 않았다. 폭력이 난무하는 수용소에서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희생과 헌신을 통해 사람들이 덜 불행해지도록 애쓰는 인물이다.

깡패들의 횡포에 속수무책 당하기만 하던 의사의 아내는 가위(어쩌면 신의 계시로 가져온 물건인지 모른다)로 깡패 두목을 죽인다. 나는 이 부분을 아침 시간에 읽고 있었다. 화장대에 그 부분을 펴 놓고 머리를 말리며 눈으로 읽다가 지각할 뻔했다. 나는 시간이 없는데, 그녀는 가위를 들고 하이에나의 굴(범죄 집단을 캐리커처 한 듯한 무장 그룹)로 걸어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책을 덮으면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리고 너, 총을 든 깡패가 말을 이었다. 네 목소리를 잊지 않겠어. 나도 네 얼굴을 잊지 않겠어.’ p.199

그녀의 입을 통해 현재를 보여주는 말들이 참 많았다. 물에 가라앉은 ‘세월호’에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애태우고 있는 가족들. 그곳에 그녀 같은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나 약해질 때가 있죠. 우리가 울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때로는 눈물이 우리를 구해 주기도 하거든요.’ p.139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매일 매일의 연약한 삶을 보존해 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p.418

이 책에서 또 기억해야 할 인물은 검은 안경을 쓴 여자다. 창녀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그 누구보다 고결한 인물이다. 엄마 잃은 소년을 보살폈고,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을 사랑한다. 결국 그 둘은 시력이 정상으로 돌아왔는데도 사랑을 확인하고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한다. 노인을 정성껏 씻어줬던 장면도 참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세 여자가 목욕하는 장면은 책을 읽는 나에게도 기쁨 그 자체였다.

‘비누 냄새도 맡았다. 이윽고 그는 소파로 돌아와 이 세상에는 아직도 삶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죽기 전에 토끼가 굶어 죽지 않도록 토끼장 문을 열어 준 노파를 기억하고 싶다. 날고기를 먹던 여자, 마녀 이미지였던 일층 노파는 죽은 손으로 아파트 열쇠를 되돌려 주었다. 두 손을 모아 노파의 죽음을 애도하게 했다.

이 책에는 ‘우리가 눈이 머는 순간에 보았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내 눈으로 본 마지막 장면을 돌아가면서 말하는데 이상하게 감동이 있었다. 갑자기 핸드폰으로 마지막 검색한 것, 어제 만난 사람 이런 걸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해 준 책이다.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 그 도시는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류미정(공주교육지원청공주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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