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

[금강일보] 봄철이 여성들의 계절이라면 가을철은 남자들의 계절인 듯하다. 그리고 남녀 모두 사색과 철학을 논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봄의 꽃잎이 떨어지면 빗자루로 쓸어 버리지만, 가을 낙엽이 떨어지면 책갈피에 접어 넣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거다. 그래서 가을의 단상을 함께 읽고 음미하면서 한 시인의 정서로 경험되는 가을을 나누어보고 싶다.

①“뒤뜰 평상에 널린 탐스런 붉은 고추/지붕 위에 걸터앉아 금방 터질 것 같은 호박/노랗게 쪼그라지는 맷방석의 무말랭이/싸리 담쟁이 너머 아이들 밤 따는 소리/눈 시린 햇살에 빛나는 감나무 이파리/한가로이 졸고 있는 닭 쫓던 얼룩이/툇마루 밑에 신발 베고 잠든 냥이/울타리 너머 들깨 터는, 도리깨의 휘파람 소리/붉은 햇살에 노을 진 하늘가/가을이 누렇게 익는다”(최부암/가을 단상 1)

②“여름을 뜨겁게 살랐던 태양은 넉넉한 햇살 담은 바람이 되어, 가을을 넉넉히 살찌우고/지나간 추억을 알알이 담아, 터질 것같이 영글은 포도알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끝없는 코스모스들판을 마음껏 우롱하는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유영하듯 수를 놓으니/기어이 보내는 여름이 서러워, 목놓아 울던 구슬픈 풀벌레 소리가, 가을을 더욱 재촉한다”(최부암/가을 단상 2)

③“도시의 숲은, 매연과 소음 속에서 고요한 세상을 꿈꾼다. 아스팔트 틈에서도 야생초는 생존을 위한 희망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희망을 알지 못한 채 지나간다. 조금만 돌아보면 삶이 여유로워질 터인데/도심의 숲은 척박한 세상을 사는 현대인의 마음의 고향이다. 무덥고 잠 못 드는 열대야의 연속…. 기록적인 장맛비에 울고 기록적인 가뭄에 또 우는, 갯마을 바다는 녹조까지… 사나운 계절에 멍든 가슴, 그러나 계절은 어김이 없다/벌써 꽃들은 가을을 재촉하지만, 한낮 햇살은 여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서 인정사정이 따갑다. 그래도 계절의 오고 감은 어김이 없다/새벽이면 이불을 찾고 따뜻한 차가 그리운 계절/산자락 너머 서쪽으로 해가 기울고, 아파트 창가에 놓인 화초들은 사랑을 듬뿍 받아 사시장철 푸르게 행복하다. 도시의 척박한 건물에도 학마을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저 넓은 하늘 언저리는 이름을 갖지 않아도 늘 푸르게 빛난다. 한가로운 산책로 뒷담 길에는 정성 어린 손길로 붉은 고추는 알뜰히 갈무리 되어가고, 아파트 한켠에 널린 호박은 눈 시린 햇살에 바짝 여위어, 동짓달 긴 겨울 뉘 집 식탁에 솜씨 좋은 반찬으로 풍성하게 오르리… 지금 정년 가을이 오고 있는 거지? 불볕 여름을 시퍼런 몸으로 견디며 인내하더니, 가을은 꿈꾸던 붉은 포도알은 터질 듯 익어 단내음 흠뻑 머금은 그때 그 사랑을 닮았고, 담벼락 담쟁이는 아직도 철없이 푸르게 제 세상이다/봄과 여름내 꽃 피우던 인동초 역시 햇살에 아직도 붉게 피어나 향기를 머금고 있다. 콘크리트 담장 틈으로 모질게 뿌리를 내린 이름 없는 들풀도 숭고하게 아름답다. 산책로 모퉁이에 누군가 심어놓은 토란이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다. 알뿌리는 추석 상 토란국으로 즐기는 밥도둑의 나물로 변신하여 어느 집 밥상에 오르리니…/도로 길섶에도 매연과 흙먼지 뒤집어쓴 채 초연히 피어난 코스모스 한 무리, 바람에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연약한 꽃 그대 이름은 코스모스, 태양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빛깔 고운 꽃으로 견뎌온 당신, 여리고 연약할수록 더 강하게 견뎌온 당신은 이 땅의 어머니 같아. 뜨거운 햇살을 견디고 인내해야 고운 빚을 내는 어머니 꽃. 과일도 가뭄에 시달리고 강한 햇살을 이겨내야 더 깊은 맛을 담거늘. 요즘의 우리네 아이들은 살집만 불린 온실 속의 화초 같아 느끼는 바 크다/누가 알려주지 않았음에도 꽃들은 계절을 안다. 가을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연보랏빛 쑥부쟁이, 보랏빛 두드러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청아한 마음의 고향을 닮았다. 여름내 피고 지던 꽃들은 아직도 꽃을 피운다. 한줄기 내린 꽃은 마디마디를 피어선 지고 질기게 모진 여름을 잘 견뎌왔다. 꽃을 다 피우고도 대는 아직도 건재함을 뽐내는 모습이 대견하다.”(후략) (가을 단상 3).

도심과 시골의 가을 풍경을 사진기로 찍듯이 질서정연하게 그려내는 그 솜씨에 우선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이제 여름의 극단적인 날씨(홍수 아니면 가뭄)를 정리하여 하늘은 높고 푸르게 땅은 더 풍요하게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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