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아동청소년문학작가

[금강일보] 팔원(八院)

-서행시초(西行詩抄) 3

백석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 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내지인: 일본인, 내임: 요금

▣ 내가 백석의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백석은 월북 시인이란 이유로 남한에서 금기시됐다가, 1987년 월북 작가 해금 조치 후 활발하게 소개됐고, 내가 백석의 시를 처음 본 것도 그때였다. 그러나 그때는 다른 해금 작가들과 같이 출판된 책을 보면서 말로만 듣던 백석의 시가 이렇구나 하는 식으로 대충 훑어보는 정도였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우리말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면서 백석의 시를 자세히 읽고,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수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고향’, ‘여승’, ‘여우난곬족’ 같은 시는 공책에 베껴 쓰기도 했다. 그 가운데 ‘팔원’을 읽으면 내 첫사랑이었던 ‘기정이 누님’을 떠올렸다. 기정이 누님은 내가 어려서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 선배다. 나와 함께 학교를 대표해 웅변대회에 나가기 위해 연습을 했는데, 나보다 두 학년 위인 그녀에게 처음으로 이성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가졌다. 그러나 그녀는 졸업 후 서울로 가 거기서 공장 생활을 하며 지냈는데, 나중에 폐병에 걸려 토혈 후 시골집에 내려와 요양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팔원’은 1939년 11월 10일 조선일보에 발표됐다. 1939년이면 일제의 식민지 조선 탄압이 극을 향해 치달아 갈 때다. 일제는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에 대한 통치 방식을 다시 강경하게 바꾼다. 일제는 1931년 만주 침략을, 1937년 중국 대륙 침략을 본격화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그들은 계속되는 전쟁 속에 더 많은 식민지를 탐했고, 그로 인해 조선은 일본 군국주의를 위한 병참기지가 돼 온갖 수탈이 자행되고 탄압은 극심해졌다. 1920년대까지 조선을 식량 공급지로 여기던 일제가 1930년대 들어 조선을 군사작전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관리·보급·지원하는 대상으로 봤기 때문이다.

‘팔원’은 이 시기에 백석이 관서지방(평안도)을 여행하던 중 아침에 팔원이라는 곳에서 묘향산으로 가는 승합자동차를 탄 어린 계집아이를 보며 쓴 시다. 이 시는 다른 서정시처럼 시의 화자가 서술 주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시의 화자인 ‘나’가 등장해 시를 진술해 가는 보통의 서정시와 달리 화자가 철저히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로 말한다면 3인칭 관찰자 시점에 해당한다. 이렇게 화자가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시의 효과는 ‘객관성’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자성이라는 곳으로 가는 승합버스 안에서 일어난 일을 주관적 감정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일제강점기 일본인 밑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나의 첫사랑 기정이 누님이나 ‘팔원’에 나오는 계집아이는 살아가는 시대만 다를 뿐 처한 상황은 비슷하다. 둘 다 어려서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고, 그러기 위해 가족과 일찍 헤어지고 정든 마을을 떠나야 했으며, 이후 대처를 전전하며 망가진 몸으로 병들고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힘없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몸 하나를 밑천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마치 바람이 불면 눕는 풀과 같은 사람들이 있어 우리의 삶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내가 시를 쓰면서 결코 놓지 않으려고 하는 ‘민중성’이라는 것도 이러한 시와 기정이 누님 같은 분들이 내 곁에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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