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는 효자·효녀들] ①문화에 드리워진 자본주의, 방치되는 효 관련 유형문화재
  • 김현호 기자
  • 승인 2020.09.15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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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송씨, 여흥민씨, 충주박씨 효자·효녀 다수 배출
일부 정려각은 아예 방치… 관심은 물론 재원도 없어

[금강일보 김현호 기자] 한국과 중국, 일본, 멀게는 베트남까지 유교문화권에 속한다. 이들 나라의 근간은 유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국가 중 유교의 발상지 중국보다 되레 우리나라에서 유교 사상이 여전히 뿌리 깊다. 나이에 따른 상하관계, 존댓말이라는 언어적 특징 등이 그렇다.

특히 유교에서 가장 중시되는 효(孝) 사상은 지구상 그 어느 나라보다 선명하다. 예부터 효는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조정이 나서 치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효자·효녀에 대한 기록은 점차 소멸되고 있다. 기록이 소실됐다고 효행의 흔적마저 사라지게 둘 순 없다. 희미해지고는 있지만 동방예의지국을 지탱하는 효의 가치가 잊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살펴본다. 편집자

대전과 연관이 깊은 은진송씨(恩津 宋氏), 여흥민씨(驪興閔氏), 충주박씨(忠州朴氏) 등은 꽤 많은 효자·효녀를 배출했다. 은진송씨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란 대표적인 인물이 태어난 가문으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로 상징된다. 사상가, 정치인 집안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뿌리 깊은 가문이었던 만큼 꽤 많은 효자들이 인구에 회자된다. 여흥민씨와 충주박씨는 처음부터 대전에 본을 둔 가문이라 할 수 없지만 조선시대 때 일부가 대전에 터를 잡았다. 여흥민씨는 임진왜란 이후 민여검(閔汝儉)이 대전으로 와 지금의 유성구 도룡동에 뿌리를 내렸다. 충주박씨는 합천이씨(陜川李氏)의 사위로 대전에 자리잡아 세력을 넓혔고 지금의 서구 도마동 대부분의 땅을 물려받았다. 두 가문 역시 많은 효자를 배출,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해진다. 세 가문 모두 문중이 현재의 재실 등을 관리하며 가문이 배출한 효자비와 효녀비를 애지중지 보전하고 있다. 은진송씨의 경우 조선후기 문신 김경여의 어머니 은진송씨의 정려각이 대표적이다. 김경여의 어머니는 회덕현 백달촌 중리에서 태어나 22세 때 결혼했으나 몇 달 만에 남편이 2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남편을 따라 자결을 시도했으나 복중에 태아가 있던 상태에서 부친의 간곡한 만류로 뜻을 접었다. 그렇게 유복자 김경여를 낳아 훌륭하게 키웠다. 김경여는 훗날 관직을 통해 나랏일을 한 충신으로 항시 “어머니 덕에 나라에 충성할 수 있었다”고 했단다. 김경여의 모친은 부친이 위독해지자 약지를 베어 피를 마시게 했고 손가락뼈를 가루내 드렸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효심의 표식으로 정려각이 세워졌고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됐다. 지금도 완벽하게 관리돼 대전의 대표적인 효 관련 유형문화재로 손꼽힌다.

문제는 상당수 효행의 흔적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방치돼 있다는 점이다. 구한말 문관을 지낸 송용재(宋龍在)의 생가는 동구 이사동에 있으나 관리를 전혀 받지 못해 폐허로 남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3년 시묘살이를 해 조정이 세운 유성구 구룡동 이병득(李秉得)의 정려문과 정려각은 기와는 무너져가고 수풀이 우거져 제대로 출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효행의 상징이 훼손된 것은 문중이 관리를 잘 못했거나 후손이 끊겼기 때문 등인데 국가나 자치단체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관심이 없으니 재원도 없는 탓이다.

김덕균 한국효문화진흥원 효문화연구사업단장은 “충청권은 물론 전국적으로 방치된 정려각 등이 상당하다. 다양한 원인으로 관리가 안 되고 있는데도 재원이 없어 자치단체가 나서지 못 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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