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교진 세종시교육감

최근 ‘전교 1등’이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 단어 속에는 우수하다는 의미와 고생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말을 한 이유는 그 ‘우수성과 들인 노력’에 상응하는 대우를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것과 그 정도 수준이 아니면 접근할 수 없는 직군이라는 것이지요.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저로서는 여러 생각을 합니다. 과연 우리 사회가 어린 학생들에게 어떤 교육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을 합니다. 우리가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은 좀 더 이웃을 사랑하고, 연대하고, 협력하기 위함입니다. ‘짐승’이 갖는 약육강식의 본능을 줄여가고,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람’으로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이런 교육은 ‘사람’만이 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한때 ‘배워서 남 주자’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육활동의 과정과 결과가 사람 사이에 계층을 만들고, 우월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학교체제가 이 사회에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원래 평가는 어느 정도 배웠고, 그 배움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서 부족한 것은 채우는 일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절대평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평가입니다.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쳤는지, 학생들이 제대로 배웠는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학교체제가 채택하고 있는 평가는 ‘상대평가’입니다. 1등부터 꼴찌까지 줄을 세우는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생들이 배움의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변별력’이 더 중요한 잣대입니다. 즉, ‘잘 하는 학생’중에서 ‘아주 잘하는 학생’과 ‘잘하는 학생’을 구분하기 위한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출제하는 일입니다.

초중고등학교라는 학교과정에서 배워야 할 만큼 배웠으면 될 일인데, 굳이 상위그룹에서 가장 잘 하는 아이와 그 다음 아이를 구분해야 하므로 배울 필요가 없는 지식을 묻는 ‘변별력있는 문제’를 출제합니다.

평가는 교육과정을 지배합니다. 어떤 문제가 나오느냐에 따라 교육의 내용이 결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잘 나오는 내용을 공부하는 것과 실제 운전에 꼭 필요한 내용을 공부하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학교는 출제경향에 매달립니다.

꽤 오래 전, 대학마다 본고사라는 시험이 있던 시절, 서울대학교 본고사 문제의 경향이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실의 교육내용을 결정했습니다. 몇 명이 진학하지 못하는 서울대학이지만, 대한민국 고등학교는 그 출제 경향에 매달려 수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본고사 부활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 ‘변별력’ 때문에 굳이 배우지 않아도 되는 수준의 수업을 합니다. 그 ‘변별력’ 때문에 수포자가 생깁니다. 그 ‘변별력’ 덕분에 사교육이 번성합니다. 교육이 사람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분하고 낙인찍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 한 인간에게 꼭 필요한 재능일까요? 우리가 평가의 내용으로 삼는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들일까요? 우리는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그 평가가 한 인간을 다른 인간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을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질 만 할까요?

바느질과 미적분 문제풀이 중에서 어느 재능이 의사에게 더 필요할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미적분 문제풀이 보다 바느질이 더 필요한 재능입니다. 바느질은 수술에 꼭 필요한 재능입니다.

달리기와 수열과 행렬의 지식중에 어느 재능이 의사에게 더 필요한 재능일까요? 제가 보기엔 달리기가 더 필요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 시간 넘게 수술실에서 수술하는 의사에게 필요한 것은 강인한 체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가하는 대상이 그 직업에 꼭 필요한 재능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절대평가를 요구했습니다. 학생 상호간 경쟁을 통한 ‘순서 정하기 평가’가 아니라 그 학생의 도달수준을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습니다. ‘전교 1등’과 ‘전교 2등’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추었다는 것을 입증하면, 그 다음부터는 대학에서 적성과 소질에 따라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됩니다.

교육은 기르는 것이지 가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