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모든 것은 왔다가 가고, 갔다가 다시 온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느낀다. 낳았던 것은 자라서 익어 떨어져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서 같은 과정을 반복하여 지속한다. 그것이 생명세계의 논리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상 그런 상황이 와서 큰 작별을 해야 하는 때가 되면 먹먹하고 슬프고 아프고 아쉽고 안타깝다가 한 편 시원한 바람을 얼굴에 맞는 것 같은 느낌에서 위안을 삼고 제 삶을 이어간다.

나는 며칠 전 큰 작별의 사건을 가졌다. 1927년 음력으로 7월 19일에 태어나 94년 세월을 살고 2020년 9월 28일 고요히 그 님의 품으로 내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일제 말 정신대에 젊은 처녀들을 끌어간다는 소문에 어린 나이에 서둘러 혼인한 뒤 가마 타고 넘던 마티고개를 76년이 되는 때 캐딜락 영구차에 실려 넘어 맏아들과 사위가 인도하는 시댁 묘소에 미리 와 있던 남편 곁에 묻혔다. 일제 말과 해방정국과 이념갈등과 남북이 싸우던 전쟁상황에서 똑똑하고 잘났다는 큰오빠를 잃고, 주변의 젊은 청년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아들들에게는 절대로 똑똑하게 나서서 단체를 꾸리고 활동하는 것을 극구 말리고 걱정하던 어머니, 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당신을 통해 나온 여덟 남매는 제 힘으로 공부하겠다는 이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뒷받침을 하겠다며 작은 발로 이러저리 뛰었다.

그리고 만난 예수를 통하여 삶의 또 다른 의미를 찾고, 한 평생을 그를 따르고 의지하면서, 가정과 자녀들을 실패없이 잘 꾸리고 길렀다. 자나깨나 가족과 자녀를 위한 것이 그녀의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려면 스스로 올곧게 살아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10여 년은 참을 위해 살았다. 그것을 위하여 자손들과의 만남도 자제하였다. 만나는 시간에 기도와 찬송과 거룩한 말씀 읽기와 예배로 뒷받침하겠다는 뜻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나는 특별한 병환 없이 기력이 쇠진하여 꺼져가는 그녀의 생명불 곁에서 할 수만 있다면 오래 있고 싶었다. 극진히 모시는 여동생 집에 계시겠다는 그 곁에 누워 자면서 손을 만지고 다리를 주무르면서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혼자 속으로 많이 하였다. 몸져누운 한 달 동안, 매일매일 마치 사그러드는 잿불처럼 쇠잔하는 모습을 보면서 삶과 죽음이 무엇일까를 많이 생각하여 보았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나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큰 작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너무 슬프고 아팠다. 죽음의 비밀이 알고 싶었고, 그것을 알려면 또 삶의 신비를 알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에게 그냥 비밀이요 신비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몇 사람들의 시구가 있다. 칼릴 지브란이 쓴 ‘죽음에 대하여’와 ‘떠나는 말씀’이 그것이요, 롱펠로의 시 ‘화살과 노래’가 생각났고, 함석헌의 시 ‘수평선 너머’와 ‘빈들에 외치는 소리’가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멀리 날려보낸 화살은 오랜 뒤 보니 어느 큰 참나무에 박혀 있었고, 허공중에 날아가버린 줄 알았던 노래는 님의 가슴에 남아 있더라는 시, 강물과 바닷물이 하나이듯이 삶과 죽음도 하나라면서 ‘죽는다는 것은 옷을 벗고 바람속에 서는 것이요, 햇빛에 녹아드는 것’이라고, ‘숨이 넘어가는 것은 쉴 새 없는 물결에서 풀어 터져나가 거침없이 하나님을 찾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며, 깊고 깊은 침묵의 죽음이 짙을 때 깨달음으로 찾아오며 실현될 진리로 찾아오고야 만다는 말, 아니, ‘빈들에 외치는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 소리, 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 기도 품고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 그 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오리라’는 말씀들이 가슴을 후벼판다. 그래서 나는 어부 아닌 어부처럼, ‘바람 소리 모르는 듯, 물결 뛰놈 아니 보는 듯, 모래밭의 회리바람 아니 무서운 듯, 수평선 넘어 오는 소식 오직 들으려, 어부는 숨을 죽이고 등걸처럼 선다.’ 그래서 다시 ‘소식 갔는지? 소식 왔는지? 알 길도 없고,’ ‘끝없는 바다, 끝없는 모래 밭, 그칠 줄 모르는 떨리는 교향악, 수평선 지평선 바라보며, 그 서품에 천평선 기대고 서서, 어부는 영원히 영원을 내다보더라’는 시인의 말처럼 나도 어부 아닌 어부가 되어 소식 하나 기다린다.

어머니는 햇빛 속에 녹아 훨훨 날아 하나님 품으로 가서 그와 하나 되어 살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마지막 큰 선물을 주었다. 우리 팔남매는 평상시 큰 갈등 없이 지냈다. 어머니가 쓰러지신 뒤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 가족끼리 이 일로 갈등이 없기를, 내가 누구를 원망하지 않기를, 어머니가 평안히 가시기를 기도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자녀들을 오라 했다. 우리들이 드린 용돈 통장에서 돈을 찾아오라 딸에게 말했다. 그것을 꼭같이 나누어 당신 때문에 한 가족이 된 37명에게 고루 나누라 했다. 당신이 떠난 뒤 각자 자기들이 나가는 교회에 자기들의 이름으로 감사헌금을 하라는 것이었다.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손을 잡고, ‘예수 잘 믿고, 천국에서 만나자!’ 하는 작별의 말씀을 하였다. 올 수 없는 멀리 있는 손녀 손자와는 영상으로 인사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드시고 마시는 것이 줄었다. 당신 때문에 자녀들이 고생할 것을 염려하여 ‘하나님께 어서 가야 하는데’를 되뇌었다. 당신이 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두 번 웃었다. 내가 발을 주무르면서 ‘아, 이 발로 몇 만, 몇 십만 킬로를 달리셨을까?’ 했을 때 살짝 웃었다. 가시기 전날 저녁에 ‘어머니 한 평생 행복하셨지요?’ 하니 아까보다는 더 진한 그러나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내 어머니는 마지막 10년을 완전히 출가의 삶으로 살았다. 일체의 사사로운 가정과 사람들과의 인연을 벗어버리고, 오로지 기도 찬송 예배 말씀 읽기에 집중하였다. 그러니까 그 님과 함께 하려는 삶, 진리를 몸에 가득히 담으려는 삶으로 채웠다. 그것을 아는 우리는 슬프지만 울음을 삼켰다. 그의 말씀은 새록새록 우리 가슴에서 살아날 것이고, 그의 진리스런 삶은 소리 없이 빛으로 찾아와 우리를 깨울 것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