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균 한국효문화진흥원 효문화연구사업단장

 

중국은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가 들어선 이래로 일시적 혼란과 분열, 그리고 그에 따른 왕조 교체는 있었어도 한족 내부의 중화제국은 연속됐다. 동양문화를 개관한 라이샤워는 제국의 전통을 꾸준히 이어간 중국의 원동력을 멸망한 로마제국과 비교했다.

로마보다 우월했던 한족의 제국적 이상, 능력과 덕망을 기준으로 선발된 지식인 관료들의 뛰어난 도덕성과 정통성, 그리고 주변 민족을 압도하는 인구와 한자(漢字)라는 탁월한 문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서 자신들의 철학과 정신을 담을 수 있는 문자는 특별히 눈여겨볼 대목이다.

예부터 중국은 중원을 장악한 민족이 정치행정의 실권을 쥐고 주변 나라들을 통치했다. 간혹 변방국들이 중원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다시 한족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럴 때마다 변방국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상실하고 한화(漢化)의 길을 걸었다. 한족이란 큰 바다에 소수민족의 특별한 문화가 희석된 것이다.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몽고족과 만주족이 그랬다. 칼로 나라를 얻을 수는 있지만, 다스리는 것은 붓으로써만 가능하다는 말을 실증하는 예라 할 수 있다.

중원은 물론 세계를 제패했던 몽고족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정복의 흔적은 찾을 수 있지만 지탱의 역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날카로운 병기의 정교함과 마구(馬具)의 견실함은 볼 수 있어도 제국을 통치했던 몽고글자로 된 서책은 보기 어렵다. 강력한 청나라를 건설했던 만주족도 동양정신의 총합이라 일컫는 사고전서를 편찬했어도 한족의 문화유산을 집대성한 것일 뿐이었다.

글자는 진리를 담는 그릇이라 했다. 문자의 중요성을 말한다. 수 천 년 영욕의 세월을 경험한 중국이 꾸준히 통일 국가를 이룰 수 있던 배후에는 한자라는 문자가 있다. 복잡한 뜻글자로서 어려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대국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한자와 그로 인해 만들어진 수많은 서책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중국의 변방국가로서 사대의 예를 갖춰야만 지탱 가능했던 나라가 오늘날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이면에는 하면 된다는 근면 성실한 자세, 강인한 정신력과 불퇴전의 상무정신, 뛰어난 효경(孝敬)사상과 질서의식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에 지날 뿐 본질은 아니다. 이를 담을 수 있는 그릇, 곧 우리의 글자, 우리의 철학과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우리의 글자 한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어려운 한자 서책들을 하나하나 우리글 언해본으로 출간한 것은 정체성 있는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효경’과 ‘소학’을 언해본으로 출간한 것은 효와 예를 한국인의 기본정신과 생활방식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기존의 한문책들은 한자를 터득한 일부 특권층만의 전유물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함께해야할 효와 예절도 신분고하가 나뉘었다. 하지만 한글본이 나오면서 효와 예는 모든 사람의 기본덕목이 되었다.

더 크게는 중화제국의 주변에서 끝까지 정체성을 유지하며 독립국으로 온전할 수 있었던 것도, 오늘날 세계 문화의 선두주자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 고유한 우리의 문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자는 그 민족의 정신과 철학을 담아낸다. 우리의 정신과 철학을 담아낸 뛰어난 한글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굳이 한글을 없애려고 했던 것도, 우리의 선열들이 목숨 걸고 한글을 보존하려 했던 것도, 글자에는 우리의 정신과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girl’을 ‘갸루’라 ‘back’를 ‘빠꾸’라 하지 않고, 원음에 가까운 ‘걸’과 ‘빽’이라 표현할 수 있는 뛰어난 글자,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중의 하나”,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 등등의 찬사가 이어지는 한글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다. 그것도 중국과는 다른 우리의 정신과 철학을 담은 우리의 소리로 바르게 가르치기 위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떳떳한 우리의 글자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