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궁의 별명을 가진 20세기 최고의 궁사는?
무등산 폭격기로 불리는 투수는?
평생 물과 함께 살아간 수영 선수는?
대한민국 마라톤의 영웅은?

출처 - 대한체육회

올해 대한민국의 최고 스포츠 영웅은?

대한체육회는 지난 9월 9일 제12차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선정위원회를 개최하였다. 개최 결과 ‘2020 대한민국 스포츠영웅’후보 중에서 최종 후보로 김수녕, 선동열, 조오련, 황영조 등 4명이 선정되었다.

올해의 영웅 후보자 4명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출처 - 대한체육회

김수녕

20세기 최고의 궁사이며, 한국의 ‘신궁’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수녕은 올해의 영웅 후보자 4인 중 한명이다. ‘신궁’이라는 별명은 오직 김수녕에게만 부여된 별명이다.

‘신궁’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수녕은 초등학교 때 체육교사의 제의로 양궁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양궁을 시작한 김수녕은 금세 두각을 나타내었다.

본격적으로 양궁을 한지 2년만에 여자초등부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고, 중3때에는 전국양궁종합선수권 예선에서 국가대표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다.

고등학생이 된 1987년에는 최연소 국가대표에 뽑히며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88년 1월 인도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5관왕에 오른 김수녕은 한국대표팀의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이후 서울올림픽에서는 개인전과 단체전을 석권하며, 한국 체육인 최초로 올림픽 2관왕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1993년에 은퇴를 한 김수녕은 6년 만에 선수로 복귀하였다. 이후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인전 동메달, 단체전 금메달을 따냈다.

2011년에는 세계양궁협회에서 ‘20세기 최고의 여자 양궁 선수’로 선정되었다.

‘20세기 최고의 여자 양궁 선수’로 선정 된 김수녕이 2020 올해의 스포츠영웅에 등극할 수 있을지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출처 - 대한체육회

선동열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선수(포수)였던 형의 영향을 받아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선동열에게 인생의 선물인 야구를 선물한 형은 불운하게도 일찍 세상과 작별을 고하였다.

형이 세상을 떠나고, 선동열은 가족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치며 야구를 해 나갔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선동열은 결국 아버지에게 야구를 허락 받게 된다. 허락 당시 선동열의 아버지는 “이왕 시작했으니, 국내에서 최고가 될 생각으로 해라, 그렇지 않은면 아예 시작하지 말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 말 덕분인지 선동열은 최고의 투수대열에 오른다.

선동열의 공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일화로는 연습 파트너인 포수가 그의 공을 받다가 공을 잘못 받아서 몸의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일화대로 강속구를 던지는 선동열은 고교 3년, 1980년 전국 4개 대회에서 2차례 우승, 노히트노런도 기록을 하였다.

1981년 선동열은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에 입성하였다. 입성 당시 선동열은 재구가 좋지 않았다. 이러한 선동열은 당시 대표팀의 포수였던 심재원의 도움을 받아 교정에 성공하였다.

교정을 받은 선동열은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에 참여하였다. 한국대표팀의 출발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대표팀에는 선동열이 있었다. 선동열은 미국, 자유중국전 여기에 일본까지 선동열의 호투로 승리할 수가 있었다.

선동열의 호투로 한국은 1938년 대회 창설 뒤 44년 만에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하였다. 더불어 대표팀의 막내였던 선동열은 MVP가 되면서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선동열은 투수라면 모두가 원하는 꿈의 0점대 방어율의 기록, 리그MVP, 다승왕, 6번의 한국시리즈 우승 등 수많은 기록들을 세웠다.

‘무등산 폭격기’라고 불리며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선동열이 올해의 스포츠 영웅이라는 업적도 남길지 기대가 된다.

 

출처 - 대한체육회

조오련

평생 물과 함께 살며, 물과 가장 친밀한 사람이 있다. 바로 故 조오련이다.

손발이 남달리 커서 수영을 하기 좋은 몸이다. 라는 평가를 가지고 있었던 조오련은 1970 방콕 아시안 게임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1970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조오련은 400m에서 금메달을 따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뒤 이어 1500m까지 금메달을 목에 걸자 많은 사람들이 조오련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1970 방콕 아시안 게임을 시작으로 하여, 1974년 아시안 게임에서도 자유형 400m, 1500m 1위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어서 1978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접영 2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수많은 메달을 딴 조오련은 수영 전 부문에서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조오련은 은퇴를 하였다. 하지만 물과는 멀어지지 않았다. 1980년에는 대한해협 48km 횡당을 하였고, 2005년에는 독도를 횡단 등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성공하였다.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맞아 재도전을 준비하던 조오련은 2009년 심장마비로 세상과 일찍 작별을 하였다.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할 도전을 통하여 세상을 살아가신 故조오련이 올해 대한민국 최고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 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출처 - 대한체육회

황영조

마라톤 영웅 황영조는 세계 수준에서 크게 뒤져 있던 한국 마라톤의 위상을 높여 준 인물이다.

어렸을 때부터 또래에 비해 운동 신경이 좋았던 황영조는 고등학교 때부터 육상을 시작하였다. 사이클부를 하였던 황영조는 폐활량이 좋았다. 그래서 중장거리 선수에 적합하였다. 이러한 황영조는 장거리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황영조는 고교 1학년 때 5000m와 10,000m를 달렸다. 이후 70회 전국체육대회에서는 5000m와 10,000m 2관왕에 올랐다.

장거리 선수로 시작 한 황영조는 코칭스태프의 지시로 페이스 메이커로 마라톤에 출전하였다. 마라톤에 첫 출연한 황영조는 놀라운 기록을 이루었다. 자신도 예상치 못 한 3위라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이 기록은 한국 최고기록에 1분1초 뒤진 기록이었다.

일본 역전경주대회에 출전한 황영조는 한국 대표로 출전하여 내로라하는 일본 선수를 모두 제치고 구간 1위를 하였다. 구간 기록을 마라톤으로 환산하면 2시간 9분이 가능하였다. 이러한 기록 덕분에 자신감을 얻은 황영조는 마라톤으로 종목을 바꾸게 되었다.

황영조는 마라톤으로 종목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마라톤 훈련을 하게 되었다. 마라톤 훈련을 받은 황영조는 기록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1992년에 한ㄴ국 마라톤의 염원이었던 2시간10분의 벽을 허물며 신기록을 달성하였다.

황영조로 인하여 세계 수준보다 뒤쳐져 있던 한국 마라톤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황영조 선수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한국 마라톤의 위상은 낮은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마라톤 위상을 높인 황영조 선수가 올해의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등극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김수녕, 선동열, 조오련, 황영조 선수들은 모두 종목은 다르더라도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밝힌 영웅들이다. 올해의 영웅으로 누가 선정되더라도 모두가 영웅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현재 대한 체육회에서는 2020.9.18.일부터 2020. 10. 18일 18시까지 스포츠 영웅 국민 지지도 조사를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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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한민국의 최고 스포츠 영웅은?

신궁의 별명을 가진 20세기 최고의 궁사는?
무등산 폭격기로 불리는 투수는?
평생 물과 함께 살아간 수영 선수는?
대한민국 마라톤의 영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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