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분신 항거 재조명

 전태일이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을 올린 가운데 전태일의 분신 항거가 재조명되고 있다.

전태일 분신 항거는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피복공장 재단사로 일하던 노동운동가 전태일이 노동환경 개선을 외치며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분신한 사건이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의 한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나 1954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1960년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으로 편입하였으나, 같은 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학교를 중퇴하고 이때부터 동생과 함께 동대문시장에서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1965년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기술을 바탕으로 평화시장의 피복공장 보조로 취업해 하루 14시간씩 힘겨운 노동을 하고 일당으로 당시 차 한 잔 값인 50원을 받았다.

이듬해 직장을 옮겨 미싱사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어린 소녀들이 일당 70원을 받으며 점심도 굶은 채 고된 노역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이때부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이 무렵 함께 일하던 여공이 직업병으로 인해 폐렴 3기 진단을 받고 강제 해고되는 등 사업주의 노동착취와 비인간적인 행위가 계속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여공들의 어려운 일을 도와주고 하였으나, 여공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해고되는 아픔을 겪었다.

1968년 우연히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인 노동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구입해 법의 내용을 이해한 뒤, 이때부터 평화시장 재단사들을 중심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6월 드디어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고 회원들과 평화시장 여공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려주면서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역설하는 한편, 설문을 통해 평화시장 내 노동실태를 조사했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로 끝나고 평화시장에서도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전태일은 한동안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하게됐다.

1970년 9월 평화시장의 노동환경 개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그는 재단사로 일하면서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켜 ‘삼동친목회’를 조직한다. 그 뒤 노동실태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를 수합하고,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노동조건 개선을 희망하는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리면서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평화시장 근로개선 운동에 나서, 10월 8일 2명의 동료와 함께 평화시장(주) 관리사무실을 찾아가 사업주 대표들과 임금·노동시간·노동환경의 개선, 그리고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해줄 것 등을 협의했으나 번번이 지켜지지 않는다.

이에 분개한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분신사건 당일인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火刑式)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를 준비해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평화시장 주변에는 시위 소식을 들은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경찰들은 평화시장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사업주들은 노동자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주위를 향해 소리 높여 그들의 요구를 외쳤으나 플래카드를 경찰에게 빼앗기고, 시위 역시 경찰의 방해로 무위로 끝나갈 즈음, 전태일은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 분신자살했다.

전태일 분신 항거는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70년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시작으로 1970년대에만 전국에서 2,500여 개에 달하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 모두가 전태일 분신 항거에 자극을 받아 출현하였다. 그 결과 전태일 분신 항거는 오늘날에도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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