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김조년 한남대 명예교수

이 세상에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지 않는 집단, 기관, 국가, 민족, 종교가 있을까? 나는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고 본다. 그런데도 또 생각하고 생각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고 싶고, 행복하게 살고 싶고, 부유하게 살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면서 살고 싶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것을 향하여 매진한다. 매진하는 행렬에 끼어들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간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그래야 한다고 믿어서 그렇게 산다. 그렇게 하는 것에 더 빠르고, 더 많이, 더 좋게 해야 한다는 데 모든 힘을 다 쏟는다.

그렇게 하여 ‘무한의 세계에서 무한한 힘’을 가진 듯 온갖 것을 쏟으면서 산다. 그런데 아주 쉽게 한계에 부딪친다. 그래서 피곤하다. 힘이 든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만큼 지치고 답답하고 어렵다. 생각하고 궁리하고 연구하여 한다는 것이 결국에는 죽을 데를 찾았다는 옛말과 같이 지금 상황이 그렇게 됐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위험 때문에 문명과 문명사회가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사회가 확연히 달라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단서가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 문명과정의 방향이 달라지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짧게 끝나면 세계는 달라질 듯 다시 지금까지 달려왔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치달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상태로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스로 달라질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모순이다. 달라지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려면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져야 한다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도 바라지 않는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 그러나 지금 문명이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 그러나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위기상황의 연속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높은 산에서부터 굴러 내리는 큰 돌이 스스로 어디에선가 멈추지 못하고 계속 더 빠른 속도와 힘으로 굴러 내리는 것과 같다. 이 때 어떤 강력한 힘이나 상황이 그 돌을 막지 않으면 멈추지가 않는다. 지금 코로나19 사태는 일종의 제동장치로 보인다. 당분간 그것이 나라와 제도와 종교와 정치와 경제와 산업과 외교와 교육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멈칫하게 한다. 그것들이 방향을 바꾸거나 구르던 것을 중단하려면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제까지 굴러왔던 체계가 해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전부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문명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했고, 지구가 너무 심각하게 앓고 있기 때문에 극약 처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지구가 온난화로 몸살을 앓는 것을 넘어 파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고, 빙하가 녹고 얼음산이 녹아 바닷물이 높아져 사라지는 땅들이 많이 늘어날 것이고, 결국에는 인류의 생존에 커다란 위험이 당도할 것이라고 예언한 이들이 많았다. 거기에다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핵무기와 주체할 수 없이 많이 생산되는 물품들과 그것들을 쓰고 난 뒤 버려진 쓰레기들과 독극물들과 미세먼지들과 플라스틱과 비닐들의 반격으로 커다란 재앙이 지구상에 나타날 것이라고 많은 과학자들이 측정하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하여 어마어마하게 많은 생물종들이 사라지고, 그에 버금가는 새로운 종들이 나타나서 생태계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결국은 먹이사슬의 맨 꼭지에 있는 인류는 어떤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때때로 이 모든 주장들은 그냥 공상세계의 이야기로만 들렸다. 그런데 목전의 현실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어떻게 할 수 없이 그냥 당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증에 빠진 문명이었다. 이 때 나타난 것이 코로나19 바이러스다. 이것은 분명히 재앙이다. 이 때 할 일이 무엇일까?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하는 일이다.

지금은 전기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됐다. 그 때 전기 없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서 사람들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기 없이 살았다. 내가 다녔던 학교들은 교실마다 전기불이 들어온 곳이 하나도 없어서 야간자습이나 야간학습이 없을 때도 탁월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공부하면서 사는 아이들도 있었다. 자가용이 이렇게 많지 않을 때도, 어마어마하게 빨리 달리는 기차가 없을 때도 사람들은 여기저기를 느리게 다니면서 만나고 살았다. 인터넷이 없고 스마트폰이 없을 때도 사람들은 느리긴 하지만 편지를 쓰고 소통하면서 살았다. 무겁고 투박하고 잘 깨지고 다루기 쉽지는 않지만 질그릇을 쓰면서 플라스틱이 없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잘 살았다. 그렇게 많은 커피숍이 없고 생수판매회사가 없어도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몸을 굽혀 솟아오르는 물을 신선하게 마시면서 살았다.

아무리 컴퓨터가 잘 발달하여 인터넷 사용이 편리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종이도 많지 않고 필기도구도 좋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던 셰익스피어나 괴테만큼 많고 좋은 글을 나는 쓸 수가 없다. 칼 마르크스나 헤겔이나 루터만큼 깊고 많은 글을 나는 쓸 수가 없다. 토스토예프스키나 똘스또이처럼 사람들을 사로잡는 많고 탁월한 글을 나는 쓸 수가 없다. 온갖 지식 정보를 동원한다고 한지라도 나는 예수나 소크라테스의 몇 마디 말, 노자나 공자의 깊은 말씀 같은 것을 지어낼 수가 없다. 이 말은 나를 비하해서가 아니다. 생각 없이 그냥 세상 돌아가는 대로 살아도 되는가 하는 자괴감이 커서 그런다. 이제는 위기라고 하니 좀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다. 왜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가?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