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위원장

신라는 혈통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골품제로 신분을 구분했다.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는 성골과 진골이 있었고, 품제는 귀족과 일반 백성을 6단계 두품으로 구분했다. 골품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골품에 따라 벼슬, 결혼, 복식 등 정치·사회 활동의 범위와 일상생활 전반을 규제했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도 골품에 따라 맡을 수 있는 벼슬은 정해져 있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교하기도 한다.

여기 현대판 골품제도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 국책연구기관에서 석사급 연구원으로 시작하면 그것으로 끝까지 사회적 신분은 고정된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동시에 졸업한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후 한 사람은 석사학위를 받고 연구기관에 연구원으로 입사하고, 다른 사람은 몇 년 후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연구기관에 연구위원으로 입사한다. 먼저 입사한 사람이 나중에 박사 학위를 받거나 아무리 우수한 연구 실적을 쌓더라도 박사급 연구위원으로 승진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조세재정연구원,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한국노동연구원 등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재직 중에 국내 명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아무리 좋은 논문을 쓰더라도 연구위원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퇴사하고 나서 경쟁을 거쳐 재입사하거나 다른 연구기관으로 직장을 옮겨야만 한다. 입사할 때의 학위에 따라 두 사람 사이에는 성골과 육두품 사이만큼 커다란 신분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연구기관들이 국내 박사들에게 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미경제학회(ASSA, Allied Social Science Associations)라는 학회를 통해 주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들을 뽑아온다.

26개 국책연구기관 중 9곳이 지난 5년간 박사급 연구위원 202명을 채용했는데 이 중 국내 대학 학위자는 36명(17.8%)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개발연구원, 조세재정연구원, KDI국제정책대학원은 국내 학위자를 아예 뽑지 않았다. 국내 박사는 제쳐두고 미국 박사들을 뽑기 위해 연구기관의 경영진이 직접 미국으로 날아간다. 출장비, 간담회비, 사실상 미리 내정한 박사들을 국내 인터뷰에 부르는 비행기 값, 여비 등으로 수천만 원을 서슴없이 지출한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경우 2019년에 이 비용만으로 9800만 원을 지출했다.

수십년간 이런 연구기관에서 차별받는 연구직들은 연구책임자를 맡을 기회나 연구위원으로 승진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했다. 업무 배분과 승진에 유리 천장이 존재한다. 과학기술계 출연연구기관에서는 90년대 초반에 사라졌고 경제인문사회계 많은 연구기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데 유독 경제학 중심의 여러 국책연구기관에서 존속하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내부 승진 기회를 주고 있던 연구기관마저도 일부는 기회를 축소하기 위해서 힘을 쏟고 노조를 압박하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국내 학계가 아직 성장하지 못했던 70∼80년대에 형성된 미국 경제학에 대한 무한 신뢰와 과도한 집착이 하나의 원인이다. 국내 학위에 대한 불신과 기득권자들의 자기 몫 지키기도 한몫 했다. 박사학위도 갖고 연구성과가 좋아도 과제 책임자를 맡기지 않고 중요 업무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 결과 발생한 실적 차이를 이유로 들어 내부 승진 기회를 주지 않는 근거로 삼는다.

국정감사에서 이런 문제가 지적되자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은 이렇게 답했다. “이 제도의 유지 여부를 해당 연구기관들과 논의하고 차별을 유지하게 된다면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하겠다.” 구습을 타파하고 일체 차별은 없도록 하겠다고 답하기를 기대했지만 허망하기 짝이 없다. 같은 박사라도 업무를 차별함으로써 승진, 임금의 차별을 공고히 해온 것이 저들의 치졸하고 상투적인 수법 아니던가.

불합리하고 부당한 제도를 없애는 것은 결국 그것을 당하는 사람들의 몫으로 오롯이 남는다. 국책연구기관이 자율적이고 안정적이며 차별받지 않는 곳이 되도록 오늘도 싸우고 있는 국책연구기관의 노동자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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