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병원 국가유공자 264명 입원치료 ··· 60년·40년 가까운 후유증 시달려

"전쟁은 지옥 ··· 다시는 일어나선 안돼 희생으로 오늘 있다는 것 잊지 말아야"

대전보훈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6·25 참전용사 장호균(왼쪽) 씨와 월남전 참전용사 전정웅 씨가 전쟁의 참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 일 기자

대청호반을 향해 달리다 대전 대덕구 신탄진동의 한적한 언덕 위에서 만난 대전보훈병원. 쾌적한 공기에 청정한 자연환경과는 대조적으로 그곳엔 아직 전장(戰場)의 상처가 짙게 남아 있었다.

IMF 경제위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1997년 말 개원, 올해로 15주년을 맞은 대전보훈병원에 들어서자 호국보훈의 달 6월과 오버랩 되며 잃어버렸던 과거 속으로 회귀하는 듯한 묘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몸을 맡기거나 수년째 이곳에서 요양을 하고 있는 환자들 상당수는 6·25, 월남전 참천용사들로 현재 이곳에서 입원 치료 중인 국가유공자 264명 중 1950~53년 발발한 6·25전쟁 참전용사가 47명, 1960~70년대 월남으로 파병됐던 참전용사가 119명으로 파악됐다. 당시의 상흔(傷痕)을 지우지 못한 이들에겐 60년, 40년 가까운 세월 전쟁의 상처가 지속되며 여전히 그날의 아픈 기억이 가슴 한 켠에 각인돼 있었다.

병동에서 만난 장호균(85·대전 동구 대동)·전정웅(75·대전 서구 갈마동) 씨 역시 치열한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하늘에 맡긴 목숨을 가까스로 건진 노병이다. 넉넉한 인심의 시골 농군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장호균 씨는 일제 치하였던 어릴 적 고향 황해도를 떠나 남한에 정착, 만 19세였던 1947년 육군 경비대에 자원 입대해 3년 뒤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을 맞았다.

북한군과 교전 중 포탄의 충격으로 왼쪽 청각을 잃고 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그는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휴전 이듬해인 1954년 2월 군을 제대했고, 전쟁터에서 입은 고통은 8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고 있다.

예비역 육군 중령인 전정웅 씨는 월남전 참전용사다. 군무원 생활 10년을 포함해 37년간 군에 몸담은 그가 파월된 기간은 단 1년(1971년 4월~72년 4월). 하지만 참전 10년 후인 1982년 그는 자신이 고엽제에 의한 당뇨 합병증과 허혈성 심혈질환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됐다. 전북 군산이 고향이고 서울에서 주로 군 생활을 한 전 씨는 월남전 후유증 치료와 요양을 위해 대전에 거주하고 있다.

두 노병은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입을 모으며 국가 안보의식이 해이해지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전장에 나서 장렬하게 산화한 전우들을 떠올리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충절을 기리는 현충일이 단지 ‘노는 날’로 전락한 세태에 대해서도 서운함을 드러내며 “많은 이들의 값진 희생으로 오늘날과 같은 번영되고, 평화로운 대한민국이 건설됐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9일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아 현충탑에 참배하고, 묘역 정화활동을 한 조현묵 병원장은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고 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국가유공자들을 생각하니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며 “나라를 위해 값진 희생을 한 분들의 뜻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보훈병원 로비에 붙여진 한 액자에 오롯이 아로새겨진 문구는 병원을 나서고도 뇌리에 맴돌며 호국보훈의 달, 6월을 곱씹게 했다.

‘조국, 또 다른 우리의 이름입니다. 호국,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보훈, 미래를 위한 우리의 도리입니다.’

최 일 기자 choil@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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