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절망의 순간도 환희와 영광의 순간도 언제나 일어나는 한순간에 불과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해 줄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분과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지역구에 대한 자신의 애정, 지역 발전을 위한 원대한 포부, 지역민을 위한 헌신과 봉사 등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면서 절망어린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그러했을 것이다. 자신이 봉사자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출마하였을 터이고, 자신을 선택해 주지 않은 시민들에게 서운했을 것은 당연지사였으리라.문인으로서 창작활동을 하거나 예술 단체에 참여하고 있을 뿐,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어서 적절하게 위로할 말이 없었다. 그때 전광석화처럼 떠오르는 잠언(箴言)이 있었으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였다. 그래서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 한 소망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 지금의 절망과 아픔 또한 머지않아 극복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하나님은 견디어낼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는 것 등으로 위로를 하였고, 그 분은 나중에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잠언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유대인의 경전 주석서 미드라쉬(Midrash)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그 주석서를 직접 읽어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에 교회의 주일학교 중등부 교사를 맡았었는데, 그 학습교재에서 읽었던 단편적인 기억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더구나 종교 서적은 물론, 수상록이나 수필 등 여러 저서에서 수시로 읽게 되어 새롭던 터였다.이스라엘(유대)의 다윗 왕이 어느 날 세공인을 불러 명했다.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자신이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자신이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으라고 했다. 이에 세공인은 지혜의 상징인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이때 왕자가 말한 글귀가 바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였다. 세공인은 이를 반지에 새겨 넣어 다윗 왕으로부터 상찬을 받았다고 한다.슬프고 절망스런 일이 있다고 하자. 당장에는 어떠한 위로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참고 견디면, 러시아의 시인 푸쉬킨의 시 [삶]에 나오는 것처럼 이 또한 지나가 버림을 깨달을 것이다. 고통스럽기야 하겠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잠언을 가슴에 새기고 노력하면 절망의 나락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낙담하고 있는 분을 만나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로 위로를 하였다. 물론 이러한 위로가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터이지만, 한참 지난 뒤에 그 위로를 곱씹으며 참을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기도 하였다.그렇지만, 이 잠언은 절망을 극복하는 것보다 더 앞서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환호할 때 교만하지 않게’하는 것이 첫 번째 경계(警戒)였다. 따라서 이 잠언은 승리한 분들에게 들려 드릴 명언이다. 선거에서 당선한 분들은 한껏 고양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시민을 위한 봉사자라는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기 전에, 점령군과 같은 오만의 극치를 보일 때도 있다. 이때 다윗 왕의 초심(初心)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말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문처럼 반복해야 할 잠언이다. 살다가 보면 어려운 상황과 행복한 일들이 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럴 때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되새길 일이다. 자신은 물론 우리의 이웃들에게, 위로와 경계가 절실한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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