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아동청소년문학작가

윤사월

박목월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기대고
엿듣고 있다

윤사월(閏四月)은 흔히 윤달이라고도 하는데, 1년에 음력 4월이 두 번 끼어 있는 걸 말한다. 양력으로 1년은 365일이고, 음력으론 354일이어서 약 11일 차이가 나는데, 3년에 한 번 혹은 8년에 세 번 윤달을 둬 양력·음력 날짜를 맞춘다. 윤달이 든 해엔 음력 4월만 두 번 끼어 윤사월은 늦봄인 양력 5~6월에 해당한다. 옛 어른들은 “윤달에는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안 난다”라며 묘지 이장 같은 평소 꺼려하던 일을 윤달이 든 해에 했다. 윤달에는 세상의 모든 잡귀신이 쉬어 마음 놓고 그런 일을 해도 된다는 속설 때문이다.

이 시의 배경도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가는 5~6월이다. 공간적 배경은 깊은 산골의 외딴집이고, 작중 인물은 ‘눈먼 처녀’다. 이 시의 화자는 그 눈먼 처녀를 바라보는 어떤 이, 아마도 시인 자신일 터인데, 작중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고 화자는 뒤에 숨어 마치 관찰자 시점의 단편소설 같다.

흔히 한시에서 많이 쓰이는 선경후정(先景後情)으로 돼 있고, 영화의 첫 부분처럼 원경(외딴 봉우리)에서 근경(외딴집)으로 시선이 이동한다. 노란 송홧가루 날리는 윤사월 어느 늦은 봄날 꾀꼬리가 운다. 고요하고 한가롭기만 한 산속 풍경에 싱그러운 생명의 약동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산속 외딴집에는 눈먼 처녀가 산다. 남의 산을 관리하는 산지기인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데, 아버지는 집에 없고, 처녀 혼자 방에 있다가 꾀꼬리 울음소리를 듣는다. 처녀가 일어나 더듬더듬 벽을 더듬어 문설주에 서 바깥소리를 엿듣는다. 여기서 꾀꼬리 울음소리는 눈먼 처녀와 밖의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박목월(1915~1978, 본명 박영종)은 박두진·조지훈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1946년 ‘청록집’을 발간했다. 향토적 서정을 민요조 가락에 담담하게 담아 ‘나그네’, ‘산도화’, ‘청노루’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은 자연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전통적 율조를 살려 쓴 박목월의 문학적 재능을 “북에 소월이 있다면 남에는 목월이 있다”는 말로 기렸다.

어려서 조인행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서울로 전학 가기 전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였다. 내가 살던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여러 마을을 돌보 열두매기라고 했는데, 인행이는 먼 산 너머 외딴집에 살았다. 나는 인행이네 집에 한 번도 가보지 못 했다. 어린 내가 산을 넘어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나 아버지께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인행이네 근처까지 갔다 왔다는 말을 몇 차례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먼 길을 인행이는 혼자 걸어 다녔다. 마을로 이어진 들길을 한참 걸어 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산길이 이어졌는데, 또 그 산을 톺아 올라 그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집에 늘 혼자 다녔다. 그러니 자연 인행이는 학교에서 왕따였다. 학교 근처에 사는 아이들의 텃세가 심해 괴롭힘을 당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건 덩치도 작지 않고 공부도 잘해 괴롭힘을 스스로 방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인행이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턱에 힘을 꽉줘 입술을 한일자로 굳게 다문 채 괴롭히는 아이를 오히려 안됐다는 듯 측은한 눈길로 바라봤다. 조인행. 지금도 보고 싶은 친구. 그러나 나는 서울로 전학 가 인행이를 보지 못했다. 오래전 어머니 살아계실 때 혹 인행이 소식을 알고 계신가 하여 물어본 적이 있지만 어머니도 아시는 바가 없었다.

‘윤사월’을 읽거나 노래를 부르면 인행이 생각이 난다. 인행이 가족이 어떻게 되고 그 아이 집이 산속 어디에 있는지 몰랐지만, 아마도 이 시에 나오는 공간과 거의 같았을 것이다. 인행이네 집 마루에도 봄이면 바람에 날린 송홧가루가 노랗게 쌓였을 테고, 햇빛 가득한 마당에 꾀꼬리가 날아와 울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인행이가 보고 싶고, 또 보게 되면 이것을 물어보고 싶다. 초등학교 시절 왜 아이들이 괴롭혔는데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냐고. 이후 어떻게 살았고,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느냐고. 그럼 아마 인행이는 입술을 한일자로 꾹 다물고 말없이 나를 바라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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