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안 모든 역사 中 역사로 편입하려

2002년부터 고구려·발해사 왜곡 심각

신행정수도 출범맞춰 역사 바로잡아야

세종특별자치시가 지난 1일 드디어 탄생됐다. 비록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다소 어정쩡한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세종시가 갖는 의미는 대단하다. 우리 역사에 대왕(大王)이라는 호칭을 지닌 임금은 두 분 뿐이다. 고구려 제19대 왕으로 만주벌판의 드넓은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대왕과 조선시대 제4대 왕으로 한글창제와 문화발전을 이룩한 세종대왕이다.
세종시가 탄생한 기념으로 지난 2일 세종시자연보호협의회 회원들과 세종시민 25명이 4박5일의 일정으로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지를 찾아 떠났다. 예전의 연기군민에서 이제는 세종시민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선조가 누볐던 고구려 땅과 남북분단의 현장을 찾아 민족 번영과 통일을 기원했다. 무엇보다 통일 조국의 신 행정수도로서의 세종시의 발전과 위상 정립을 발원했다. 본보는 이번 기행을 ‘세종사람들, 고구려 가다’란 제목으로 6회에 걸쳐 시리즈로 연재한다.<편집자 주>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7월 2일 오후 6시 고구려백두산 기행단은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황해를 가로질러 밤새 가월도, 덕적도, 연평도, 백령도를 스치고 북측 장산곶과 신도 앞바다를 지나 15시간만인 3일 오전 9시경 중국 단동(丹東)의 동항에 도착했다. 단동은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 신의주와 마주 보고 있는 국경도시이다.

배에 승선한 관광객들이 서해낙조를 감상하며 인천갈매기와 교류를 나누고 있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중국 땅에 도착한 첫 날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내리자마자 비가 내린다. 첫날 일정에 잡힌 압록강 단교(斷橋)에 버스가 도착하니 억수같은 장대비가 내려 할 수 없이 마지막 날 들르기로 하고, 점심식사 후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집안(集安)시로 향했다. 버스로 압록강 상류쪽으로 달려 4시간 30분이 지나니 고구려의 최고 번성기를 누렸던 옛 고구려 국내성(현재 집안시)의 성터가 눈에 띤다. 현대화된 집안 시가지를 가로질러 광개토대왕비와 광개토대왕릉(중국식 호칭 호태왕릉)에 도착하니 여전히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이름으로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국가적 연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쪽의 변경 지역인 만주 지방의 역사, 지리, 민족 문제 따위를 연구한다. 동북공정은 중국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심하게 왜곡하여 우리 역사의 뿌리를 송두리째 훼손하고 있다. 심지어는 고구려사까지 중국의 소수민족 역사로 자기나라 역사라고 왜곡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시민 단체와 학회가 고구려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힘쓰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론의 보도와 국민적인 관심, 그리고 학교에서의 역사 교육 강화다.

동북공정이란 이름으로 중국의 영토 야욕이 갈수록 도가 넘은 지금, 고구려 400년 도읍지 집안은 한해가 다르게 현대화되고 있다. 비를 맞으며 찾아간 광개토대왕비는 건물 안에 갇혀 있고, 광개토왕릉은 돌무더기가 허물어진 채 볼썽사납게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중국의 참담한 역사왜곡 현장에서 바라본 실상은 충격이었다. 천 년을 버티고 풍상을 견딘 광개토대왕비는 후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후손들은 별 의식 없이 내리는 비를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일부 깨어있는 우리 역사 연구가들에 의하면 중국은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넘어 고조선, 부여 등 고대사까지도 송두리째 왜곡하고 있어, 대책이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중국은 또 고구려·발해 유적지 등에 박물관과 공원, 대규모 상징조형물을 건설해 중국의 논리를 일반인에게 주입하는 등 역사대중화 작업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광개토대왕릉에 널부러진 고구려시대 돌들을 바라보며 역사의 무상함을 느끼고 있다.
2002년에 시작된 중국의 국책 학술사업인 동북공정은 2007년 공식 종료됐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 왜곡 작업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 등 주변국의 반발을 의식해 동북공정의 주도 기관을 중국 정부 직속 연구기관인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경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 동북 3성(길림성·요녕성·흑룡강성)의 지방정부로 바꿨을 뿐 역사 왜곡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다.

길림(吉林)성은 사회과학원 산하 역사연구소 기관지인 '동북사지'(東北史地)를 동북공정이 끝난 뒤에도 계속 간행해 한국 고대사 관련 논문을 대량으로 쏟아내고 있다. 요녕(遼寧)성은 2008년 고구려연구중심을 설립해 고구려사 연구를 오히려 강화했다. 여기에 역사 왜곡의 범위도 확대돼 고구려사와 발해사는 물론 고조선, 부여 등 한국의 고대사까지도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 하고 있다.

또한 요녕성은 '요하문명론'이라는 새로운 문명 개념을 내세워 한국의 선사문화를 중국문화로 왜곡하고 중국사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요하문명론의 핵심은 만주 일대가 신화시절부터 중국 황제족의 영역이었고, 이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민족이 황제의 후예이며 그들의 역사 역시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만주 일대에 터를 잡은 고조선, 부여 등도 중국의 역사가 된다. 중국은 요녕성박물관에 요하문명전을 상설 전시하며 이 같은 논리를 지속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양식있는 우리 역사가들은 “요하문명론의 문제는 이 문명이 우리 민족의 신석기, 청동기 문화와 연결되는 문화라는 점"이라면서 "특히 비파형 동검문화와 고인돌로 대표되는 한국의 청동기 문화를 중국문명으로 바꾸어 전시함으로써 중국 청동기와 확연히 차이 나는 한국 청동기 문화 내용을 중국 문명의 일부로 설명, 우리 선사 문화의 토대를 제거하는 학술적 만행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중국이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백두산을 '중국의 산'으로 만드는 작업도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백두산을 관할해왔기 때문에 백두산이 중화문명권에 속한다는 논리다.

길림성은 장백산 문화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2001년 '길림성 장백산문화연구회'를 만들어 관련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어 2002년에는 백두산을 '중국의 10대 명산'으로 선정, 중국의 관광지로 만들어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중국의 역사 논리를 주입시키고 있다.

중국이 장백산 문화론을 주창하는 목적은 '백두산의 중국화'를 통해 만주에 대한 한반도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간도 문제 등 영토분쟁의 단초를 제거함으로써 남북통일 이후 백두산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특히 장백산 문화론은 백두산 일대를 영역으로 삼았던 고구려·발해의 역사가 만주족의 금·청나라 역사로 연결된다는 논리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국내 학계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게다가 중국이 2003년부터 진행해 온 청나라 역사 편찬 프로젝트인 '청사공정(淸史工程)'도 갈수록 태산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이 동북공정, 장백산 문화론 등을 내세워 우리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기술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또한 '역사 현장' 왜곡도 본격화하여 고구려·발해의 역사 문화 유적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중국의 역사 논리를 일반에 전파하고 있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돈화 지역에 발해 광장을 조성하고 육정산 고분군을 공원화하면서 청나라 시조의 사당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또 고구려의 대표 산성인 용담산성 일대를 국가공원으로 조성하면서 공원의 정문은 한나라 양식으로, 박물관은 당나라풍으로 만들고 발해왕이 당나라 황제의 조서를 받는 조형물과 청나라 건륭제 사당 등도 설치할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의 조법종 교수 등 학자들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최근 동북 3성에 자기들의 역사 논리에 맞는 '공간'을 구축하는 작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면서 "역사 왜곡을 위한 소프트웨어(논리)를 구축한 데 이어 자신들의 역사 이념이 투영된 하드웨어(공간) 구축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학계에서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비단 학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점차 일반 대중 속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중국이 동북공정에 이어 요하문명론, 장백산 문화론 등 역사 왜곡을 위한 논리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동안 우리의 대응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중국이 범국가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고, 역사 왜곡 상황이 발생하면 한국에서는 그때마다 대책을 마련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데 총괄적인 정책을 세우고 대응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전문가들이 "세계적인 학술행사 개최 등 제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중국 측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토대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 것을 정부는 귀담아 듣고 실천해야 한다.

옛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현 집안시)의 성터가 고구려 유적지임을 표시하고 있다.
오노균 세종시자연보호협회장(전 충청대 교수)은 “만주 땅은 고조선과 고구려 등 우리 선조의 땅이었고, 불과 100년 전만해도 지금 연변 등의 땅인 간도가 한민족의 땅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청나라에게 빼앗긴 것이었다”며 ”시민단체에서 간도찾기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지만 국민들의 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현재 땅은 비록 중국이 차지하고 있지만 기세 상 역사와 정신만은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다. 이른바 정신적인 시효 지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역사는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흐르고 있다. 단군 이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조선시대 세종, 영조, 정조 때 등 잘 사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숱한 전쟁과 환란의 시기도 겪었다.

21세기 통일 한국의 행정수도로 기대가 되는 세종특별자치시의 희망적인 미래는 결국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한민족의 얼이 서린 백두산과 옛 광활한 영토인 고구려에서 기운을 받아온 만큼 세계적인 명품도시로 만들자는 것이 이번 세종 고구려·백두산 기행단에 참가한 세종시민들의 마음이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른 광개토대왕릉의 허물어진 돌무더기 앞에서 빼앗긴 우리 역사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각오가 마음 한 구석에서 솟아오름은 이번 기행의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간도협약> 간도(間島)는 우리 선조인 부여, 고구려 사람들이 말 달리던 그 만주(지금의 중국 동북지역)이며 잃어버린 이름이다. 1712년 조선과 청나라가 경계를 표시하는 백두산 정계비가 생겼고, 1881년 청나라에서 간도를 개척하고자 자국 국민들을 이주와 개간을 장려하면서 영유권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그리고 1909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무순(撫順)탄광 개발권을 얻는 대신 지금의 두만강을 국경으로 간도지방의 영유권을 청나라에 넘겨버렸는데 이것이 바로 간도협약이다.

<신도성 객원 논설위원·세종의 소리 편집인>

*이 기사는 본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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