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졸업 뒤
영남 굴지 기업 화천기공 입사
방위산업체 입사로 대전 인연
창업 통해 탁월한 기술력 입증
“중소기업은 소·부·장 첨병
종사자는 자부심 갖고 임하길”

두각을 나타내는 중소기업에겐 각자의 무기가 있다. 중소기업 치곤 강력한 자금력, 어떤 시장에서도 통할 최고의 기술력,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꾸준한 R&D까지. 그런데 ㈜금호엔티시는 조금 특이하다. 지금이야 많은 자사만의 무기를 갖고 있지만 원동력은 사명감이었다. 나라를 대표해 기술 시장에서 최일선에 선다는 마음가짐이 지금의 금호엔티시를 만들었다. 정병용(64) 대표는 그래서 늘 강조한다. 중소기업이야말로 전세계 시장에서 가장 앞서는 나의 대표들이니 만큼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금호엔티시가 기술 강국 독일에서도 통한다는 걸 입증했다.

◆엘리트길 끝에서 찾은 창업의 길

장 대표는 전남 무안 출신이다. 평범하게 학창생활을 보냈다곤 하지만 제법 머리가 비상했는지 중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단다. 부산기계공고는 그가 '공돌이'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됐다. 기계가 주는 매력이 푹 빠지면서다. 3년 동안 기계와 사랑에 빠진 그는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한 뒤 광주의 화천기공㈜에 입사했다. 화천기공은 지금도 호남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인데 당시에도 화천기공에 들어가는 건 굉장히 어려웠다. 평범하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그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가졌는지 유추할 수 있다.

1977년 화천기공에 입사한 정 대표는 10년 가까이 일했고 군대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에 군복무 대체를 위한 방위산업체에 입사한다. 당시 충남 대덕군, 지금의 대전 유성구 인근의 한 방위산업체를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대전과 연을 맺었다. 기계·설비 등에서 전국구인 화천기공 출신이 당시 시골인 대전에 왔다는 소문에 그의 방위산업체는 물론 인근은 제법 떠들썩했다.

“화천기공에 다니던 친구가 왔다는 이야기가 돌았죠. 그럴 만도 한 게 화천기공은 당시 영남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였고 지금도 존재할 정도로 탄탄합니다. 부산기계공고 졸업 이후 약 10년 동안 화천기공에서 일하고 방위산업체로 군 문제까지 해결하자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한 번 들더라고요. 회사 다닌 양반들은 모두 한 번씩 겪지 않나요?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 있잖아요.”

◆진짜 사업가를 꿈꾸다

방위산업체를 다니면서 군 문제를 해결한 그는 이후 곧바로 창업 준비를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금호엔티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금호특수기계다.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하고 화천기공 출신이 세운 회사여서 그런지 그는 어렵지 않게 기술력을 뽐낼 기회를 금세 맞는다. 당시 한 원자력연구소가 핵연료 국산화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함께 할 기술 좋은 중소기업을 찾았는데 금호특수기계가 이름을 올렸다.

이제 막 걸음을 뗀 중소기업이었지만 제법 기술력 좀 있다고 입소문이 난 탓이다. 1988년 프로젝트에 들어갔을 때 금호특수기계와 함께 참가한 중소기업은 약 20개. 1997년까지 10년 동안 진행된 프로젝트에서 중도 하차한 기업만 열손가락을 넘었단다. 금호특수기계는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함께한 몇 안 되는 중소기업이었다. 이 기간 금호특수기계는 자금 순환을 위해 핵연료 국산화 프로젝트 말고 다양한 사업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핵연료 국산화 프로젝트를 비롯한 다양한 사업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금호특수기계는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그러나 정 대표의 피로도는 갈수록 극대화됐다. 입찰 경쟁이 주는 스트레스다. 거기에 자체적인 판로를 갖고 싶다는 정 대표의 욕심도 있었다.

“핵연료 국산화 프로젝트에 참가할 때 금호특수기계는 끝까지 살아남았어요. 기술력을 인정받은 것이었죠. 해당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업 수주에도 성공했는데 여기에 따라오는 압박감이 너무 컸어요. 입찰 경쟁이 주는 피로감이죠, 여기에 언제까지 관 주도 사업에만 참가하겠는가에 대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진짜 사업가가 되고 싶었던 거죠.”

◆남다른 기술력이 강제로 해외 진출시키다

핵연료 국산화 프로젝트가 끝난 1997년. 대기업이 줄도산하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지고 만다. 저녁 TV뉴스의 헤드라인은 매일 ‘기업 순위 00위의 기업 파산’일 정도로 국가적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 대기업마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중소기업은 풍전등화였다. 금호특수기계와 여러 프로젝트에 함께 했던 중소기업들도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IMF 사태는 금호특수기계에도 여파가 미칠 것으로 보였지만 그의 기술력은 단단했다.

정 대표와 금호특수기계의 뛰어난 기술력을 보여주는 사례도 이때쯤 나왔다. 당시 금호특수기계는 한 기업의 하청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하청 순위가 가장 마지막이었단다. 기술력이 부족한 대신 자금력이 탄탄했던 발주 기업이 해결하지 못 하는 걸 하청기업이 해결하는 형식이었는데 첫 번째 하청기업이 어려워하는 기술은 차순위 기업이, 차순위 기업도 해결하기 어렵다는 건 후순위 기업이 담당하는 체계였다. 그래서 금호특수기계가 담당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기술이 필요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금호특수기계는 단 한 번도 발주 기업이 요구하는 걸 실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주 기업은 금호특수기계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금호특수기계보다 먼저 일거리를 받는 기업은 기술력이 아닌 영업력으로 승부했기 때문이다. 좀처럼 크게 성장할 기회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금호특수기계를 눈여겨 본 한 미·일 합작기업이 정 대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시 미·일 합작기업은 8개국에서 활동하는 이름 좀 날리는 곳이었는데 정 대표와 함께 일하자고 권유한 것이다. 단 테스트 차원에서 미·일 합작기업은 자사가 활동하는 8개국에서 순차적으로 활동해보라고 권유했다. 즉 미·일 합작기업의 판로를 빌려줄 테니 기술력을 뽐내보라는 것이었다. 금호특수기계는 이 시기 법인 전환을 통해 지금의 금호엔티시로 사명을 변경했다.

◆최전선에 선다는 입장으로

동남아를 시작으로 미·일 합작기업의 판로가 있는 국가들을 기술로 하나둘 점령하던 금호엔티시는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독일로 향했다. 독일에서 정 대표는 경악을 금치 못 했단다. 기술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그지만 독일의 그것은 상상을 초월했다. 독일에서 사용되는 일본의 설비도 엄청났다.

“독일 가보니 진짜 놀랐죠. 특히 일본의 기술력이 정말 무서웠어요. 우리는 일본을 쉽게 무시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곧장 일본으로 일정을 변경해서 기술력 좀 있다는 업체를 방문해 이들의 기술력을 배웠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일본을 꼭 방문하던 정 대표는 자신의 기술을 더욱 갈고 닦았고 이제는 전기차 분야 세계 1위 기업 테슬라와 거래하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코로나19 사태에 다시 국내 판로 확보에도 나섰는데 기술력을 바탕으로 소·부·장의 국산화에 성공하며 많은 시장에서 안착했다. 정 대표와 금호엔티시의 성장사(史)는 어떻게 보면 기술력과 R&D의 합작처럼 보인다. 실제 그들의 이빨과 발톱은 그것이다. 하지만 기술력과 R&D의 원동력은 다른 데 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면 다들 알 겁니다. 우리야말로 전세계 산업 시장에서 최전선에 있다는 걸요. 즉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거죠. 절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에 절대 성장을 멈출 수 없었어요. 이게 금호엔티시의 동력입니다.”

금호엔티시는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해외 활동보단 국내 활동에 조금 더 주력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자 정 대표는 다시 한 번 비상을 준비 중이다. 그의 가슴 속에 새겨진 사명감이 있기에 우리나라는 일본은 물론 독일 등 전세계에 꿀리지 않을 기술력을 자랑할 수 있다.

글·사진=김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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