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국진 전 대전교육과학연구원장

며칠 전 한 모임에서 옆자리 친구가 물었다. 5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도 되느냐는 것이 요지였다. 며칠 전에 갑자기 등장한 입학 연령 하향 문제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자, 학령기 아이가 있을 리 없는 친구도 이 문제가 궁금했던 것이다. 내 대답은 그랬다.

“지금도 법적으로 5세에 입학할 수 있고, 다섯 살에 학교 가는 아이들이 있다네.”

정부에서 5세 입학을 추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5년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된 교육개혁심의회는 2년여에 걸친 심의 결과 14개의 개혁과제를 보고하였다. 그 중 열네 번째 개혁과제가 ‘학제의 발전방안’이었다. 이 보고서에서는 유치원의 명칭을 유아학교로 바꾸고 기본학제에 포함시켜 ‘K-5-3-4’ 학제를 제안하였다. 이 때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선별적으로 조기화하고 유급제와 월반제를 활성화하자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구체적인 사회적 논의를 거치지 못한 채 대통령의 임기 종료와 함께 흐지부지 되었다. 이 제도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이명박정부 시절이었다. 2009년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회의 곽승준 위원장은 문득 5세 입학 방안을 발표했다. 당연하게도 유아교육계와 보육 관련단체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당시 교육부는 1년여간의 숙고 끝에 정책을 폐기한 바 있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5세 입학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했지만 정책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이 무렵에도 반대 여론이 논의를 압도하는 분위기였다. 이 아젠다는 추진할 때마다 사회적으로 폭발적인 반대가 있었다.

대통령의 교육 정책을 자문하는 그룹이나 미래 교육정책 담론에서 5세 입학을 자꾸 거론하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어린이들의 성장과 발달이 과거에 비해 빨라졌다는 것이다. 문자를 학습하거나 사회적 기술을 습득하는 연령이 낮아져서 5세 무렵이면 기본교육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의무 교육을 1년 앞당겨 학부모의 교육부담을 대폭 낮출 수 있고, 계층에 따른 교육의 출발점 기회를 균등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을 든다. 그래서 입학 연령의 하향화는 자주 저출산 문제와 결부되어 논의되곤 했다. 5세 입학은 노동력이라는 또 다른 국면의 저출산 문제와도 결부된다. 조기 입학을 하게 되면 결국 사회에 일 년 먼저 진출하게 됨으로써 그만큼 더 많은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필자가 만나본 사람들의 반대 논리는 그런 체계적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자기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아이들을 학교라는 체제 속에 두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걱정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우선 놀면서 세상을 익혀야 하며, 학습은 그 다음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철도 없는 아이들을 입학시킨다고 저출산 문제나 노동력 문제가 해결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마음 급한 어떤 사람은 필자가 속해있는 동아리 단톡방에 반대 서명 URL을 올리면서 열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열을 올리는 사람들 말고도 이 정책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만큼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많고, 이 사람들의 힘 또한 작지 않다. 몇 년 전, 잘 나가던 유력 대통령 후보의 기세를 단숨에 꺾었던 일도 이와 관련된 문제였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유아기 교육 문제의 사회적 폭발력은 작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 논리들은 ‘5세 입학’이라는 의제가 가지는 국가 백년대계의 의미를 조금도 줄이지 못한다. 세계적으로도 5세 입학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현재 4개국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확대일로에 있다면 숫자가 문제는 아니다. 1987년 당시 조기 입학 정책을 꺼냈을 때, OECD 국가에서 5세 입학이 가능했던 나라는 단지 한 나라였다. 2009년 이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에는 두 나라, 10년이 조금 더 지난 지금은 넷 또는 다섯 나라 정도가 5세 입학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이런 나라들도 치열한 사회적 논의를 통해 제도를 도입했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 의제가 가지고 있는 가치는 무엇이고 문제는 무엇인지 심각하게 논의해 보아야 한다. 문제 중에서 당장 해결해야 할 것과 시간을 가지고 더 논의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찾아보고, 이해 당사자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 가야 하는지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이 중요하고 커다란 문제를 관성적으로 반대부터 할 일은 아니다. 이 문제가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고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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