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연구소 꿈꾸는다락방 대표

진한 아메리카노와 로맨스 영화가 보고 싶어지는 것을 보면 올해도 여지없이 가을이 찾아오지 않았나 싶다. 잘 생기고 아름다운 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든 환영받는 단골 소재다. 하지만 오늘은 삶에 지친 중년의 로맨스를 매력적으로 그린 영화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 뉴욕에 사는 광고 음악 작곡가 하비(더스틴 호프만)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런던으로 간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딸은 신부 에스코트를 자신이 아닌 새아버지에게 맡기겠다는 섭섭한 말을 하고 마침 회사에서는 해고 통보를 받는다. 돌아갈 곳도, 남을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한 그는 우울한 마음을 풀려고 카페에 들렀다가 역시 삶의 무게에 짓눌린 여자를 만난다. 케이트(엠마 톰슨)와 이야기를 나누며 둘은 서로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공항 카페 옆자리에서 만난 하비와 케이트는 템즈강 주변을 거닐며 많은 얘기를 나누고 결국 하비의 부탁으로 케이트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하비의 딸 결혼 피로연에 같이 가게 된다. 결혼식 전날에도 결혼식에서도 어색하게 겉돌던 하비는 케이트의 동행 덕분에 딸에게 편안한 모습으로 더 따뜻하게 대할 수 있게 된다.

영화는 두 인물이 처한 상황들을 꼼꼼하게 묘사하고, 그들의 마음을 읽는 데 정성을 다한다. 그들에게 왜 사랑이 절실한지, 현재 그들의 심정이 어떤지 영화는 잘 알고 있다. 마음 한쪽에 외로움의 통증을 감춰둔 인물을 두 배우가 우아하고 세련된 연기로 표현하고 있어 관객은 자연스럽게 이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

하비는 영화 내내 무기력하다. 가족관계, 직장, 연애 무엇하나 원만치 않지만, 꼬인 매듭을 스스로 풀 능력도 없어 보인다. 분장으로도 감출 수 없는 호프만의 노쇠한 얼굴이 영화 속 남자의 처지를 닮아 더욱 애처롭게 보인다.

한편, 케이트도 아픔이 있는데 여비서와 바람난 아버지 탓에 홀로 된 엄마한테 수시로 전화가 걸려오고, 믿었던 사랑의 배신으로 한 차례 낙태 경험이 있는 케이트에게 사랑은 그저 사치일 뿐이다.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설 자리를 잃고 혼자가 된 하비와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케이트가 다시 용기를 내는 과정을 따뜻하게 담았다.

영화는 사랑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사랑으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건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갈 수 있는 용기뿐이라고 말한다

영화 속 호프만은 소소한 삶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을지언정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비의 마지막 로맨스는 템스강 주변의 낙엽길을 함께 걷는 중년 남녀를 보여주며 마무리되지만 늦가을보다 늦게 시작한 둘의 사랑이 어떤 결실을 맞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화려하지 않은 그 순간에도 내 곁에 나와 키를 맞추기 위해 힐을 벗은 채 맨발로 걷는 케이트 같은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가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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