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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Why] 충남도청은 왜 내포로 간 걸까?

2020. 02. 11 by 정은한 기자

예부터 충청권 중심지는 홍주 VS 공주
中 부상에 맞춰 황해경제권 시대 선포

충남도청 이전이 결정되자 천안·아산·서산·보령·서천에선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최종 이전지는 역사적 상징을 품고 있는 내포였다.

충남도청이 자리한 내포신도시는 충남 홍성 홍북읍과 예산군 삽교읍 일원에 위치해 있다. 지난 2013년 1월 충남도청과 충남도의회가 이전하고, 2월엔 충남도교육청이 이전함으로써 도청 신도시로서 얼개가 잡혔다. 같은 해 10월엔 충남지방경찰청이 옮겨와 주요 3기관의 이전이 마무리됐다. 바야흐로 충남도의 내포 시대가 도래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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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라는 지명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최초로 언급된다. 고려 후기 공민왕 당시 왜구 침입 기록에 ‘가야산 인근 10골’을 내포로 규정했다. 예부터 내포는 가야산 연맥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이 육로는 고립시키고 해로는 열리는 특이한 구조였다. 금북정맥을 사이로 금강문화권(공주)과 구별돼 보수적 양반문화와 혁신적인 양면성이 꽃 피워졌다. 특히 산둥반도와 마주한 해외 무역로의 요충지인 태안반도를 통해 상당한 문물이 내포로 유입돼 정치·군사·경제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태안반도 백화산에 백제의 태안마애삼존불이 자리한 것도 중국의 불교를 비롯한 선진문물이 해로를 통해 유입됐다는 것을 반증한다.

내포신도시 전경(2014년 12월 촬영). 금강일보 DB

육로는 포구를 통해 연결된다. 삽교천이 수많은 포구를 만들어냈고, 예당평야를 끼고 있는 내포의 곡창 부리포엔 곡식이 몰려들었다. 충남 전 지역과 충북의 옥천, 경기도 평택의 모든 세곡은 내포 조운의 집결지인 공세곶창에 모였다. 또 삽교천의 지류인 예산 고덕 구만포 물길을 통해 조선 후기 실학사상도 탄생했다. 남당 한원진과 추사 김정희는 물길로 학문을 교류했다.

하지만 시련도 기록된다. 조류가 4노트에 달하는 험난한 안흥량 탓에 조선 태종 당시 조운선 30척이 난파되고, 익사자 100명, 쌀 만석이 좌초됐다. 이에 가로림만과 천수만 사이에 굴포 물길을 내기 위한 대규모 운하 개척공사가 시도되기도 했다.

내포의 행정 중심지는 현재 홍성군인 홍주였다. 보령의 오천항 물길이 곧바로 홍주까지 이어진 탓에 오천항엔 과거 내포 해안의 방어기지인 충청수영성이 위치했다. 바닷길과 포구가 없는 육로는 예덕상무사들이 해미고개와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에서 받아들인 중국 문물을 바깥세상으로 풀어놓았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중국의 국력이 급격히 기울며 서해안 시대가 막을 내렸고, 1895년(고종 32년) 충청남도가 탄생한 이래 충남의 행정 중심지는 금강문화권인 공주로 옮겨졌다. 공주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공주의 항일운동이 격화되자 충남도청은 일제에 의해 1932년 경부선과 호남선이 깔린 대전으로 이전됐다. 충청도 제1갑부 김갑순이 기탁한 선화동 부지 1만 1000평이었다.

이제 충남도의 내포 시대가 시작된 지 7년이 흘렀다. 중국의 급부상에 맞춰 황해 경제권 시대를 내포에서 열겠다는 포부였으나 내포 이전의 상징성이 성공적으로 부활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럼에도 충청권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 충남도가 내포로 가야 했던 이유를.

정은한 기자 padeuk@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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