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 2] 188. 빈의 쉔브룬 궁전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빈은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환상도로를 기준하여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이것은 1857년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1848~1916)가 도시의 성벽을 허물고 넓은 대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구시가지는 도보로 둘러볼 수 있지만, 링 바깥은 트램이나 지하철을 타야 한다.
빈 시내에서 남서쪽에 쉔브룬 궁전(Schloss Schonbrunn)은 당시 유럽의 초강대국 프랑스와 필적하는 합스부르크가의 레오폴드 1세(Leopold I: 1658~1705)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1696년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보다 더 화려하게 설계한 것이다. 쉔브룬이란 ‘아름다운 샘’이라는 의미인데, 이 일대는 원래 과수원과 물레방앗간이 있던 시골이었다고 한다.
50만 평에 이르는 넓은 대지에 지은 쉔브룬 궁전은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으나, 6년 동안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3층 건물인 궁전의 외관은 바로크양식이고, 내부는 로코코 양식이다. 궁전의 전체적인 모습은 물론 궁전 뒤편에 넓은 정원의 모습까지 베르사유 궁전과 매우 흡사하지만, 베르사유 궁전이 왕과 수많은 대신, 시중 등 5000여 명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였다면, 쉔브룬 궁전은 합스부르크가의 가족들만이 오붓하게 즐기는 큰 저택에 불과했다. 또, 쉔브룬 궁전은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 1740~1780)가 가장 좋아하던 크림색으로 단장하여 ‘마리아 테레사 엘로우’라고도 하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이곳을 여름 궁전으로 사용하고, 호프부르크 궁전(Hofburg)은 겨울 궁전으로 삼는 호사를 누렸다.(자세히는 2023.11.15.번 호프부르크 궁 참조)
현재 쉔브룬 궁전은 1441개의 방 중 45개의 방만 개방하고 있는데, 그나마 궁전 내부는 사진 촬영을 금지하여 아름다운 벽화는 물론 천장의 프레스코화, 온갖 진귀한 장식물들을 담을 수 없다. 최근 삼성그룹의 협찬으로 한국어 안내방송이 가능한 헤드셋을 나눠주고 있어서 다행이다. 쉔브룬 궁전은 1996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으며, 쉔브룬 공전 경내에 있는 빈 동물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다. 쉔브룬 궁에서는 오스트리아 마지막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용하던 침실과 모차르트가 6살 때 콘서트 했다고 하는 ‘거울의 방’이 가장 유명하다.
먼저, 쉔브룬 궁에서 태어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세 때 근친혼으로 간질을 앓던 큰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는데, 그는 24세 되던 1854년 이종사촌인 바이에른 왕국의 공주 엘리자베트(애칭 Si Si)와 결혼했다. 원래 요제프 1세의 어머니는 엘리자베트의 언니인 헬레네(애칭 Ne Ne)와 결혼시키려고 했지만, 헬레네와의 맞선보는 자리에서 요제프 1세는 곁에 있던 엘리자베트에게 매혹되어서 결혼하게 됐다고 한다. 요제프 1세는 16세의 엘리자베스와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그는 68년간 통치하다가 1916년 이곳에서 죽었다. 황제는 4번 방에서 일했으며, 9번 방은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스 황비의 침실이고, 10번 방은 엘리자베스 황비의 접견실이다.
또, 1762년 10월 13일 6살 된 모차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초청을 받아 쉔브룬 궁전의 거울의 방인 16번 방에서 황실 가족과 대신들 앞에서 첫 연주를 했다. 그런데, 연주를 끝내고 여황제의 무릎에 올라가서 볼에 키스하고 내려오다가 미끄러졌는데,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 곁에 있던 6살 된 공주 마리아 안토니아가 모차르트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워주자, 모차르트는 공주에게 “우리 커서 결혼할까”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이 성사될 가능성도 없었지만, 모차르트와 동갑내기였던 공주는 1770년 14세가 되던 해에 정략결혼으로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혼인하여 ‘마리 앙투아네트’로 프랑스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프랑스 시민혁명 때인 1793년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마리 앙투아네트도 38세로 처형당했지만, 모차르트는 그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21번 방인 화려한 메인홀에서는 지금도 연회와 음악회가 종종 열린다고 한다.
30번 방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후 1805~1809년 기거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2세(Franz Ⅱ: 1768~1835)는 프랑스와 친선을 위하여 딸 마리 루이제를 나폴레옹과 혼인시켰다. 하지만,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마리는 이혼하고, 외아들과 이곳으로 돌아와서 살았다. 마리가 낳은 아들은 나폴레옹의 아들이라 하여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다가 1832년 21세의 나이로 죽고, 마리 루이제도 2년 후 죽었다. 39번 방은 프란츠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부부와 자녀들의 그림으로 채워져 있는데, 16명의 자녀와 함께 앉아 있는 가족들의 초상화가 이채롭다.
그런데, 황궁의 뒤편에도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넓이가 약 1.7㎢에 이르는 넓고 화려한 정원이 있는데, 정면에서 왼편 정원은 유료 입장이고, 오른쪽은 무료입장 할 수 있다. 유료 정원은 바로크양식으로 아름다운 분수와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정원 둘레에 로마 바티칸 성당의 광장이 그러했듯이 44개의 대리석상이 잘 배치되어 있다. 또, 정원의 잘 다듬어진 울창한 나무숲과 숲길이 방사선 모양의 모습은 영락없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모방했다.
경사진 맨 위쪽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시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1775년 쉔브룬 궁전보다 더 큰 궁전을 지으려고 하다가 재정난으로 골조만 마치고 중단한 것이다. 그리스 신전 형식의 개선문 글로리에테(Gloriette)의 양쪽 날개 부분은 로마 신전의 도리아식 기둥 사이로 12개의 아치가 있으며, 12신의 조각상이 있다. 중앙 부분의 카페테리아는 황제들이 궁정에서 아침을 먹고 마차를 타고 이곳에 와서 궁전과 빈 시내의 전경을 감상하면서 커피를 즐겼다고 한다. 그 후 30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곳은 빈의 유명 커피점으로 이름이 날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곳 글로리에테에서 바라보는 쉔브룬 궁전의 모습과 빈 시내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