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 2] 190. 빈 중앙묘지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2023-12-05     금강일보
▲ 중앙묘지 전경.

빈 국제공항에서 빈 시내로 들어오는 외곽 도로변에 중앙묘지가 있다. 중앙묘지는 1874년 당시 빈 시장 칼 뤼거(Karl Lueger)가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브람스 등 유명 음악가들의 무덤이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 곳에 조성한 공동묘지다. 중앙묘지는 UN사무총장과 오스트리아 대통령을 역임했던 쿠르트 발트하임(Kurt Waldheim: 1918~ 2007) 등 정치인, 종교계 지도자, 음악가를 비롯해 수많은 시민이 묻혀있는 공동묘지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을 참배하러 연간 200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 관광명소(?)가 됐다.

중앙묘지 입구.

빈 서역 앞에 있는 트램 정류장에서 71번을 타고 중앙묘지 역에서 내리면 중앙묘지 입구인데, 중앙묘지 입구는 우리네 국립묘지 현충원처럼 조형물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다. 유럽인들은 명당을 찾아서 묘지를 조성하는 우리와 달리 도심 가까이에 조성하여 가족이나 친지들이 언제든지 쉽게 찾아갈 수 있게 하고, 또 우리와 달리 봉분도 만들지 않고 작은 묘비만 세운다. 미국 디즈니랜드의 아름다운 성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는 ‘백조(白鳥)의 성’이 있는 독일 남서부 퓌센(Füssen) 시내에도 울타리에 덩굴장미가 가득 핀 도심에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유모차를 끌고 산책 나온 젊은 부부와 연인들이 마치 시민 공원을 즐기는 것 같았다. 중앙묘지는 2차 대전 때 연합군의 공습으로 크게 파괴되었으나, 복구하여 2001년 UNESCO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칼뤼거 교회.
가족묘.

중앙묘지 입구에는 묘지를 참배하는 참배객들을 겨냥한 노점상 꽃가게가 많고, 공동묘지여서 입장료는 없다.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음악가들의 묘지는 31A 구역으로서 중앙묘지 제2문으로 들어가면 편리한데, 제2문으로 들어가면 중앙묘지를 조성한 칼 뤼거 시장을 기리는 돔 모양의 교회가 있다. 중앙묘지의 다양한 형형색색의 묘비와 조형물들은 이곳이 조각공원인지, 공동묘지인지 헷갈리게 할 만큼 아름다운데, 대전의 뿌리공원에 조성한 다양한 형태의 성씨 유래비와 비슷하다.

독일 출신 바흐(Bach: 1685~1750), 오스트리아 출신 모차르트(Mozart: 1756~1791), 독일 출신 베토벤(Beethoven: 1770~1827)을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3대 작곡가라고 하는데, 흔히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 모차르트를 천재 음악가, 베토벤을 ‘악성(樂聖)’이라고도 한다.

모차르트 아내 동상 뒤편에 베토벤(왼쪽), 슈베르트(오른쪽).

합스부르크가의 위세를 떨치던 1750년대 음악의 도시 빈에서는 바흐, 헨델 등의 바로크 음악에 반대하고. 그리스·로마 시대로 돌아가자는 고전주의 음악이 유행했다. 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음악가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으로서 독일 쾰른 출신인 베토벤은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를 동경하여 17세 때 빈으로 이주해서 살다가 이곳에 묻혔다.

모차르트는 1791년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잘츠부르크 성당의 합창단 감독이던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아들로 태어나서 6살 때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초청으로 궁정에서 연주했고, 뮌헨, 파리, 런던으로 연주 여행을 다니면서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등 여러 양식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겼지만, 그는 1791년 12월 '레퀴엠'을 작곡하다가 악성 장티푸스에 걸려서 35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장티푸스의 전염을 두려워하던 관리들은 그의 유해를 같은 날 죽은 행려병자들의 시체와 함께 슈테판 대성당 뒤 시신 보관소에 보관했다가 인근 마르크스 묘지에 매장했다. 뒤늦게 모차르트의 죽음을 알게 된 아내와 사람들이 달려왔지만, 정확한 매장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중앙묘지 31A 묘역 한 가운데에 있는 모차르트의 가묘(假墓)를 만들고, 1902년 성 마르코스 공동묘지의 언덕에도 가묘를 만들었다. 중앙묘지의 모차르트 가묘 앞에 그의 아내 “콘스탄체‘가 레퀴엠 악보와 하프를 안고 있는 청동상을 중심으로 주변에 음악가들의 묘지가 있다. 즉, 모차르트 기념비 뒤편 왼쪽에는 독일 쾰른 출신인 베토벤, 오른쪽에는 빈 출신 슈베르트의 묘소가 있다.

슈베르트 묘지석.

17세 때 빈으로 이주한 베토벤은 성악가인 아버지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고, 하이든에게 사사했다. 그러나 20세부터 귓병을 앓기 시작하여 44세 되던 1814년에는 완전히 청력을 잃어버렸다. 1824년 교향곡 제9번의 초연을 지휘한 청중의 환호성도 듣지 못했는데, 관중에게 인사하기 위하여 뒤로 돌아섰을 때 관중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베토벤은 최초의 직업적인 음악가였으며, 그가 죽었을 때는 당시 빈 인구의 10/1에 해당하는 약2만 명이 운구행렬에 나와서 베토벤을 애도했다고 한다.

1815년 나폴레옹의 패전 이후를 낭만주의음악이라고 하는데, 낭만주의 음악가로는 슈베르트, 슈만, 피아노의 시인 쇼팽 등이 있다. 후기낭만주의 음악가로 리스트, 바그너, 말러, 브람스, 브루크너, 프랑스의 구나, 비제, 이탈리아의 베르디 등이 있다.

1797년 빈에서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난 슈베르트(Schubert: 1797~1828)는 11세 때 황실 합창단원으로 뽑힐 만큼 수재였으며, 가난과 병약하게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600여 편의 가곡, 13편의 교향곡, 소나타, 오페라 등을 작곡하여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베토벤은 죽기 직전에 슈베르트를 만나서 그가 작곡한 몇 곡 들어보고 극찬했다고 하는데, 베토벤이 죽은 후 1년 반 뒤 슈베르트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슈베르트를 교회 묘지에 묻으려고 했으나, 슈베르트가 평소 존경하던 베토벤의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서 중앙묘지의 베토벤 무덤 옆에 안치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묘지석.

요한 슈트라우스 2세(1825~1899)는 1825년 빈 근교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1804~1849)도 “숲속 이야기” 오페라 “박쥐” 등 최초로 왈츠를 비롯하여 400여 곡의 왈츠를 작곡하여 “왈츠의 왕”으로 알려진 음악가다. 아버지는 아들이 은행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아버지 몰래 음악을 공부하여 아버지를 능가하는 왈츠 작곡가가 되었다. 그는 28세 때인 1853년 빈 궁정 무도회의 지휘자가 되었고, 빈의 상징인 “푸른 도나우강의 왈츠”의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중앙묘지의 그의 묘비석에는 그의 셋째 부인 아델레(Adele)의 모습도 함께 조각 되어있는데, 그의 묘지 뒤편에는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묘지도 있다.

브람스.

또, ’헝가리 춤곡‘으로 유명한 브람스(Brams: 1833~ 1897)는 원래 독일 함부르크 출신이었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권유로 35세부터 음악의 도시 빈으로 이주하여 일생을 보냈다.

슈베르트 묘비에는 '음악의 여신' 뮤즈가 슈베르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모습이 조각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그를 애도하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묘비에는 바이올린을 켜는 천사들과 하프를 든 여인이 신나는 왈츠를 연주한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