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칼럼-길을 걷다] 용(龍)의 영험하고 상서로운 기운을 받아

2024-01-01     금강일보
▲ 일러스트레이션=송인선 서양화가

북극의 훈훈한 바다 속에 나른한 몸을 뒤채고 있던 용(龍)은, 어느날 쩌릉쩌릉 금가는 소리, 아득한 곳에서 얼음장 터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빙하에 뒤덮인 대륙들이 이제야 풀리기 비롯하는가…해가 걸렸던 저녁 바다에 달이 들어가듯 술래잡기 하는 지구의 몸짓과 더불어 평탄치 못할 바람과 운명과 생명의 두려움을 예감했다.

어느 날 아침, 용은, 하루살이 떼로 알았던 인간이 달나라와 별나라로 날아가는 것을 보고 몸서리쳤다.

그로부터 용은 생각하는 버릇을 지니게 되었다. 혼자서 천만 년을 사는 것과 대를 이어 그만큼 사는 것과 어느 편이 나은 것일까…
- 이인석 (1917∼1979), ‘용(龍)’ 부분

몸통을 틀며 꼬리를 튕기며 하늘을 찢는 비늘 돋친 용(龍).

시기하는 눈알하고 천 길 낭떠러지를 뛰며 오르내리는 성난 호랑이.

허나 이젠 용이 너에게 늘어져서 힘을 빌린다.

너에게 근육을 빼앗긴 호랑이도 더는 뛰지를 못하는 병신이다.

비단을 토하는 누에의 솜씨보다도 쉽사리 네가 마구 뿌리는 그 절묘한 멋을

어느 제비의 비상이. 어느 선녀의 너훌거리는 옷자락이 한 번인들 지녀 왔으랴.

- 성찬경 (1930∼2013), ‘추사의 글씨에게’ 부분

용의 해를 맞아 작고한 두 시인의 시편을 읽는다. 용의 의인화, 추사선생 글씨와 용의 비유 등 기발한 발상과 서사가 흥미롭다. 12간지 동물 가운데 용은 유일하게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개체다. 쥐, 소로부터 개와 돼지에 이르기까지 여러 동물들은 제각기 어느 정도 정형화된 이미지와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 용만은 동서양, 고금을 통하여 다양하고 상반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화적 존재로서 용은 뱀, 사자, 악어처럼 공격적이고 위험한 동물로 인식되기도 했다. 반면 속세의 잡답함을 벗어난 고고함과 포용, 초탈의 속성도 느껴진다. 동물 가운데서 이렇게 드물게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이로 인하여 숱한 스토리텔링의 대상이 되어왔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문화권에서 용은 상서롭고 지엄하여 고고한 분위기, 길조를 상징하는데 두루 쓰인다. 특히 지명에 ‘용’자가 애용되었는데 그 고장 전설이나 설화에서 비롯된 내력은 물론이고 주변의 지리적 형상이 용과 관련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로명 주소제가 시행되면서 오랜 내력을 지닌 ‘용’자 지명 대부분이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대도시 가운데 특히 대전이 법정동 명칭 중에 용자가 들어간 곳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용전, 용운, 용계, 용호, 용문, 용촌, 용두, 용산동 등 도시 곳곳에 용자를 쓰는 동네 이름이 즐비하다. 용이 상징하는 범상치 않은 기운과 영험함을 간직하려는 소망이 묻어나는 지역 명칭은 우리 전통문화의 전형적 표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24년 용의 해를 맞아 용이 상징하는 다양하고 신통한 역량, 한가지로 고착시킬 수 없는 자유롭고 천의무봉 상서로운 기운이 우리 사회 곳곳에 널리 퍼졌으면 한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