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 2] 209. 카라코룸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약 400㎞ 떨어진 카라코룸(Kharakorum)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뒤, 세계 정복에 나서 대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칸(Chingiz Khan: 1162~1227)이 수도로 삼았던 도시다. 오르혼강 상류에 있는 카라코룸의 ‘카라’는 몽골어로 '검다', 코룸은 '큰 성'이라는 뜻이어서 곧 '검은 성'이지만, 카라코룸은 넓은 들판에 폐허처럼 황량하다. 이것은 칭기즈칸이 유목민에게 카라코룸을 도읍으로 삼고, 2대 칸 오고타이가 대대적인 성벽과 왕궁을 지었지만, 불과 30년 만에 5대 쿠빌라이 칸이 베이징으로 천도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나라 말 명 태조가 된 주원장이 1388년 옛 도읍이었던 카라코룸을 폐허로 만들고, 1586년 라마교의 에르덴조 사원(Erdene Zuu Monastery)을 지을 때 왕궁의 석재를 모두 헐어서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스투파(Stupa: 塔)로 사원의 돌담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1889년 러시아 학자들이 폐허 상태인 카라코룸의 위치를 찾아냈고, 카라코룸은 2004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카라코룸이 몽골의 수도였을 당시 이곳을 다녀간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 플라노 드 카르피니 (Giovanni Plano de Carpini)의 ‘몽골의 역사(Ystoriae Mongalorum)’, 윌리엄 루브룩(William of Rubruck)이 남긴 ‘몽골 기행(Itinerarium)’, 그리고 유럽 상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 등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카라코룸 시대에 위대한 업적이라면,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광대한 제국 전역에 하루 여행 거리마다 여관과 역마를 둔 역참(驛站) 제도를 확립한 것이다.
고비 사막과 이어진 ‘초원의 사막’ 엘승타사르하이로 가는 길목에 있는 카라코룸은 우리네 시골 읍지역만한데, 도시의 남서쪽에 오고타이 칸이 세운 궁전터와 몽골 최초의 불교사원이자 라마교 3대 사원 중 하나였던 에르덴조 사원가 있다. 왕궁을 지었던 석재를 뜯어다가 사원의 담장으로 만든 108개의 스투파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곳만의 특징인데, 사원에는 100여 개의 사원과 300여 개의 게르에 1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했지만, 1688년 중앙아시아의 ‘준가르(Dzungars)’와 전쟁 때 크게 훼손됐다. 또 1939년 공산주의 정권의 불교 박해로 그나마 모두 파괴되었다. 황량한 들판에는 곳곳에 라마 불교의 석조물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가로 400m, 세로 400m가량 되는 에르덴조 사원에는 사방에 성문이 있는데, 현재 카라코룸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동안 중요한 유물을 모두 약탈당했다곤 해도 박물관의 규모도 작고 전시물도 매우 빈약했다. 다만, 우리는 이곳에서 오고타이 칸의 통치 당시 몽골의 침략을 받고 80여 년 동안 부마국(駙馬國) 신세였던, 그들의 시각에서 본 고려를 엿볼 수 있었다. 물론, 당시의 지명을 모두 몽골어로 표기하고 있지만, 한반도 지도와 함께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에 거란이 지배했던 몽골 땅에서의 역사적 내용들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고려를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는 '솔롱고스(Solonγos)’, 고려인을 솔랑가 (Solanga)'라고 불렀는데, 매년 고려에서 16~18세 소녀 400~500명을 공녀로 끌려온 숫자가 모두 약 20만 명이나 됐다고 한다. 몽골 정부는 화려했던 도시 카라코룸의 원대한 복원계획을 세웠지만, 언제쯤 이뤄질는지는 알 수 없다.
12세기 중엽 몽골 유목민의 부족장이던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Yseügei:1134~1171)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지만, 메르키트족인 칠레두의 아내 호엘룬을 약탈하여 테무친을 낳았다.
그러나 기록이 부족하여 테무친의 출생은 1155년설, 1163년설, 1167년설 등 다양한데, 몽골에서는 1162년 11월 14일을 탄생일로 삼고 있다. 또, 칭기즈칸의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孛兒只斤鐵木眞)인데, 보르지긴은 ‘회색 눈’이란 의미라고 하니, 아마도 아랍계 혼혈인 같다.
테무친은 1197년 케룰렌강과 쳉게르강이 만나는 카라코룸을 근거지로 삼고, 1206년 45세 때 각 부족장의 추대를 받아 ‘칭기즈칸’이 되었다. '칭기즈'란 몽골어로 ‘위대한’ 이란 뜻이고, 칸은 ‘군주’이다. 이후 테무친은 부족 중심 체제를 천호제(千戶制)로 개편하여 군사·행정조직으로 삼고 정복에 나서서 동쪽으로는 동해에서 서쪽으로 흑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1227년 서하(西夏) 정복에 나섰다가 병사했다.
칭기즈칸의 사후 셋째 아들 오고타이(太宗:1229~1241)가 2대 칸이 되어 카라코룸에 대대적인 성벽과 거대한 궁전을 짓고, 만주족 금(金)나라를 멸망시키고, 러시아와 동유럽 정복에 나서 폴란드, 헝가리를 격파하여 몽골의 위세를 떨쳤다. 오고타이 칸 때 카라코룸은 수많은 벽돌 건물과 이슬람 사원을 짓고, 조각 예술이 크게 발달했다. 오고타이의 뒤를 이은 4대 칸 몽케(蒙哥汗:1251~259)는 1252년 이라크·이란을 정복한 뒤 남송 정벌에 나섰으나, 남송 정벌 중에 죽었다. 몽케 칸의 동생 쿠빌라이(世祖: 1260~1294)가 5대 칸으로 즉위했는데, 남송을 멸망하고 원나라를 세우더니, 1267년 수도를 대도(大都:지금의 베이징)로 옮기고 국호도 원(元:1279~1368)으로 고쳤다. 그리고 할아버지 칭기즈칸을 원 제국의 태조(太祖)로 추존했다. 여담으로 몽골이 카라코룸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한 이후인 1333년, 공녀로 끌려온 개성 출신 기자오(奇子敖:1266~1328)의 막내딸 기씨는 순제(順帝)의 총애를 받아 1339년 훗날 북원(北元)의 초대 황제가 된 소종(昭宗)을 낳은 뒤 제2 황후가 됐다. 기황후는 고려 출신 내시들과 원 왕실을 장악했고, 고려에서는 친정아버지와 오빠 기철(奇轍) 등 형제들의 횡포가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 한편, 고려에서는 공녀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조혼 풍습이 유행하고, 또 남장하고 다니는 여인들이 많아서 이들을 ‘가짜 사내아이’라고 하는 ‘가시내’라는 신조어가 퍼지기도 했다고 한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