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 2] 214. 반쇼인(萬松院)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대마도는 조그만 섬 지역으로서 산세가 험하고 경작지가 부족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반도 해안을 약탈하며 살아가는 왜구의 소굴이었다. 조선은 수차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지만, 왜구를 근절하지 못하고 불가근불가원 관계를 유지했다. 반쇼인(滿松院)은 소씨 가문의 무덤이자 1615년 2대 대마도 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가 아버지이자 초대 번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위패를 모신 개인 사찰이다. 대마도 시청과 이즈하라 백화점이라고 하는 티아라 몰이 있는 네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조선통신사 역사관과 가네이시성 유적(金石城跡)인데, 가네이시성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담장을 돌아가면 반쇼인이 있다. 반쇼인은 처음에는 쇼온지(松音寺)라고 했으나, 1622년 소 요시토시의 법호(法號)를 따라서 반쇼인으로 개칭했다.
일본 3대 묘원 중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서 1985년 국가 지정 사적으로 되었다. 외국 여행을 할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트램이나 버스를 타고, 관광지 입장할 때도 편리한 그 지역 패스권을 사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대마도에서는 대마도박물관, 조선통신사 역사관, 가네이시성, 반쇼인 등 네 군데의 각각 입장료는 300엔씩이지만, 패스를 사면 900엔이다.
천태종 사찰이라고 하는 반쇼인의 정문은 대마도에서 가장 오래된 모모야마 시대(桃山時代:1568~1600) 건물인데, 모모야마 시대는 1536년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를 물리친 후 1603년 도요토미가 전국을 통일한 때까지를 말한다. 일본은 사찰보다 토속신을 숭배하는 신사(神社)가 압도적으로 많다. 반쇼인에 들어서면 일본 신사에서 볼 수 있는 도리이가 없고, 우리네 사찰의 사천왕문에 있는 사천왕 두 명이 관람객을 맞지만, 1880년 화재로 재건축했다고 하는 본당 건물은 사찰이라는 이름과 달리 일본의 신사 건축양식 그대로이다. 본당 한쪽에는 1615년 대마도 초대 번주 소 요시토시가 죽자, 1622년 5월 조선 인조가 한일 양국의 중간에서 노력한 그의 공적을 기려서 하사한 삼구족(三具足: 향로·꽃병·촛대 등)이 있는데, 하사품을 전시한 상태를 보면 왜인들이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본당 뒤로 돌아서 작은 개울을 건너면 대마도 번주였던 소씨 가문 일족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햐쿠간기(百雁木)라고 불리는 132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초대 번주 소 요시토시로부터 32대 당주(堂主) 소 요시요리까지의 묘비가 줄지어 있다. 당주는 우리의 종손개념과 비슷한데, 대마도 다이묘(당주)는 조선어와 일본어를 모두 쓸 줄 알아야 했다. 어렸을 때 당주 후계자로 낙점이 되면 조선어 공부를 했는데, 소씨 20대 당주였던 소 요시토시가 초대 대마도 번주가 됐다. 일제강점기던 1931년 5월 고종 황제와 궁인 양씨가 낳은 딸 덕혜옹주와 결혼했던 소 다케유키(宗武志)의 묘소도 있다.(자세히는 2024. 6. 5. 가네이시성 참조) 소씨 가묘 일대는 마치 공동묘지 같아서 음산하기는 해도 일본 특유의 편백 숲이 가득하고, 특히 수령 1000년이 넘었다고 하는 삼나무가 볼 만하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조선에 대한 대마도 번주의 역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도요토미의 사후 세키가하라 싸움에서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마도 번주 소 요시토시에게 조선에 자신의 즉위를 축하는 사절단을 보내라고 명령했다. 조선과 왜와 사이에서 중계무역의 이익을 취하고 사는 요시토시로서는 두 나라의 국교 정상화가 필요불가결한 일이었지만, 임진왜란에 간여하지 않아서 책임이 없다는 도쿠가와의 자세를 알고 있어서 망설였다. 결국 도쿠가와의 명령에 따라 세 차례나 조선을 오가면서 조선은 국서를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 왜란 중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 중종의 선정릉을 도굴한 범인 압송해 올 것, 납치해 간 포로를 송환할 것 등 3대 조건을 알게 됐다.
요시토시는 궁리 끝에 가신 야나카와 도시나가(柳川智永)와 모의하여 국서를 위조하기로 했다, 먼저, 일본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국서의 명칭을 ‘조선 국왕 봉서(奉書)’라고 위조했는데, 봉서란 먼저 화해를 청하는 용어였다. 위조한 국서에는 직인 이정이덕(以政以德)을 날인했는데, ‘이정이덕’은 당시 양국 간에 사용한 국서 도장이었다. 또, 잡범 2명을 왕릉 도굴범이라고 하여 조선에 넘기고, 임진왜란 때 끌고 간 조선인 포로도 일부 송환하는 등 화해 분위기를 띄웠다. 한편, 먼저 조선에 국서를 보내지 않은 도쿠가와에게는 조선통신사의 이름으로 조선 국왕의 문서를 위조하여 보냈다. 이렇게 대마도 번주는 조선과 에도 바쿠후 사이에서 위조 국서를 보냈다. 조선은 국서 위조 사실을 뻔히 알고, 또 대마도 번주가 보낸 왕릉 도굴범도 가짜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한다는 구실로 1607년부터 1624년까지 3회에 걸쳐 사명당 유정(惟政)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보냈다.
마침내 조선은 일본과 통교를 허용하는 기유조약이 성립되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 동안 12회에 걸쳐 조선통신사를 파견했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대마도에 도착하면, 대마도 번주는 에도까지 수행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안내했다.(자세히는 2024. 5. 22. 대마도 개요 참조) 그런데 1635년 국서 위조 사건이 폭로되어 큰 소동이 벌어졌다.
대마도 2대 변주 소 요시나리와 가신 야나가와 시케오키(柳川調興) 간에 갈등이 생겼을 때, 야나가와가 바쿠후에게 국서 위조 사건을 고발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망을 받고 있던 야나가와는 대마도 번주를 실각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으나, 예상과 달리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는 2대 번주 소 요시노리는 무죄,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유배형을 받았다. 쇼군이 당연히 처형되어야 할 요시토시를 살려둔 것은 조선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그의 능력을 이용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후 바쿠후는 국서에 쇼군의 칭호를 ‘일본 국왕’에서 ‘일본국대군’으로 바꾸고, 대마도 번주는 조선과 무역할 때 교토 승려의 감시를 받도록 했다. 그렇게 살아난 덕택에 반쇼인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또 조선통신사의 성격에 대하여 조선과 일본의 인식은 크게 달랐다. 조선에서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달하는 기회였다고 하지만, 일본은 조선이 일본의 바쿠후에 조공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고, 교과서에도 그렇게 기술하고 있다. 물론, 초기에는 대륙 문화에 대한 일본의 갈증이 작용했지만, 1633년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서 서양 학문인 난학(蘭學)과 국제정세를 알게 된 이후에는 고리타분한 성리학에 빠진 조선을 비웃더니, 1811년 이후 에도 막부는 일방적으로 교류를 단절했다. 특히 1719년 아홉 번째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쓰시마 번의 외교 담당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제술관 신유한(申維翰)에게 "우리는 일본이다. 왜적이니 오랑캐 추장이라고 멸시하지 말라. 조선은 시종 군신의 예를 폐하지 않았던 까닭에 중국이 예의 바르다고 칭찬할 뿐이다"라고 비웃었다고 하는 인물인데, 반쇼인 옆에 지은 조선통신사 역사관 자체가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한반도의 문물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감사의 상징이 아니라, 아메노모리 호슈의 외교에 관한 자료를 소개하면서 조선통신사의 역사, 대마도와의 관계를 소개하는 등 일본 측의 불순한 의사가 숨어있는 곳이다.(상세히는 2024. 5. 29. 조선통신사 역사관 참조)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