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한국인 노벨문학상 탄생] 서사를 잃어버린 시대, ‘한강’의 기적이 일어났다
한강 작가, 韓 최초·亞 여성 작가 최초 수상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선 시적 산문” 극찬 국내 서점부터 전 세계 서점까지 매진행렬 한강 열풍 속 독서붐 기대하는 분위기도
한강 작가가 문화의 정수라할 문학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뤄냈다. 24년 전인 2000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첫 한국인 노벨상 주인공이 된 데 이어 이번엔 한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거머쥐며 K-문학의 저력을 과시했다. 지역에서도 한국인 노벨문학상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 분위기다. 모두가 한국어를 매개로 하는 우리 문학이 더는 구름 속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다. 그러면서도 앞으로의 과제를 빼놓지 않고 곱씹어본다. 제2·제3의 한 작가를 배출하기 위해선 지금의 척박한 문학 생태계를 개벽해야 한다는 숙명 때문이다. 정부가 문학과 출판을 우습게 알고 국민들이 1년 내내 책 한 권 읽지 않은 채 한림원의 낭보만 기대하는 현실에서다. 편집자
◆세계에서 꽃피운 K-문학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한국의 작가, 한강입니다.” 해마다 이맘때의 분위기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노벨문학상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위로와 함께.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우리말로 달성한 작품세계가 세계인의 이해를 널리 구하는 보편적인 언어를 통해 알려지며 세계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는 데 성공하면서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아시아 여성 작가 가운데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인공은 세계는 알았지만 우리는 주목하지 않았던 한 작가였다. 한림원은 “한강의 작품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한 작가가 이룬 쾌거는 가히 ‘한국문학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헌사로 부족하다. 어쩌면 한 작가는 세계 문학계에서 숱한 화제를 낳으며 노벨문학상으로 향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한 작가는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뒤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붉은 닻’이 당선돼 소설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2016년엔 국내 작가 중 처음으로 소설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린 한 작가는 2017년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 2018년 다시 ‘채식주의자’로 스페인 산클레멘테 문학상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작별하지 않는다’로 프랑스 4대 문학상인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품에 안으며 세계적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중에서도 한 작가가 2007년 발표한 채식주의자는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가리는 과정에서 세계 독자와 교감한 결정적인 작품으로 주목받는다. 한국문학 소재의 지엽성을 벗어난 것도 모자라 인간의 폭력성을 탐구한 보편적 주제로 세계 문단으로 공감대를 넓힌 점에서다. 한 작가는 노벨문학상 발표 직후 “이 소식이 한국문학 독자들과 친구 작가들에게도 좋은 일이 되기를 바란다”며 “작가들은 삶에서 의미를 찾고 때로는 길을 잃고 때로는 결연했는데 그들의 모든 노력과 힘이 나의 영감이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기자회견은 따로 열지 않기로 했다. 세계가 전쟁으로 치열한 탓이다.
◆오랜만에 웃는 국민들
10월의 어느 밤 찾아온 기적에 국민들도 모처럼 환한 웃음을 만면에 머금고 있다. 무엇보다 오늘의 결실이 결코 행운처럼 찾아오지 않았음을 잘 아는 문학계의 기쁨은 크다. 한국작가회의는 논평을 통해 “한 작가의 영광은 여린 생명을 감싸 안은 문학 언어를 위한 축복”이라며 “한 작가의 수상 소식은 대한민국 국적 작가의 수상이라는 의미를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문학 본연의 역할을 되새기게 한다”고 평했다. 우리 글맛을 살려내는 번역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한 작가의 글이 세계와 통할 수 있게 음지에서 힘을 보탠 번역 현장의 환호도 그에 못지 않다. 전수용 한국문학번역원장은 “그동안 번역원이 추진해 온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가 빛을 발한 중요한 순간”이라며 “앞으로도 더 많은 한국문학 작품들이 다양한 언어로 번역돼 세계 독자들에게 소개될 수 있도록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지역 문학계에서도 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단비와 같은 희보(喜報)인 건 마찬가지다. 한 작가를 알고 모르고를 떠나 그의 노벨문학상이 필연이었다는 반응으로 지역 문학계는 한데 뭉쳤다. 이미숙 한국작가회의 대전지회장은 “한 작가는 우리가 겪어온 고통의 역사를 산문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훌륭한 분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은 당연한 일”이라며 “나도 그의 책을 읽으며 눈물을 쏟기 했는데, 한국작가회의 회원인 한 작가는 시대 아픔을 산문으로 잘 녹여내면서도 인간 존엄의 가치를 살려내는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노벨문학상 배출국’의 멍에
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문학 미래에 대한 기대를 키우고 있다. 이제 우리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국이라는 자부심은 그 출발이다. 더 나아가 출판계와 서점가는 문학 붐이 불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간 한국인의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를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요즘처럼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노벨문학상을 왜 기대하느냐는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 성인들만 하더라도 책 읽지 않는 세태가 짙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년 국민 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 종합독서율은 2019년 55.7%에서 지난해 43%로 떨어졌다. 성인 10명 중 6명가량은 일반 도서를 연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얘기다. 한 작가가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는 뉴스에 그의 저서에 관한 관심을 지나가는 바람으로 놓쳐선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단 오프라인 서점과 온라인에선 한 작가의 책 주문이 쏟아지고 있다. 교보문고와 예스24사 온라인몰에서만 하더라도 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 직후 그의 작품이 실시간 베스트셀러 1위를 비롯해 상위 10위 대부분을 채웠다. 특히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두 서점에서만 한 작가의 책 13만 부가 팔려나갈 정도로 인기몰이가 대단하다. 오프라인 서점도 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모처럼의 사람들로 붐비는 분위기다. 지난 12일 대전 서구의 한 대형서점은 한 작가의 대표 저서가 모두 동이 나 ‘도서 예약 문의 시 직원에게 문의해주세요’라는 안내 문구를 붙일 정도로 인기몰이 중이다. 시민 A 씨는 “원래 주말에도 서점이 한가해서 자주 책 구경을 위해 방문했는데 한 작가 소식에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몰리는 것 같다”며 “노벨문학상 수상자 배출을 계기로 독서 문화에 대한 관심이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문학계에서도 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사회 전반에 걸쳐 독서율을 높이는 전환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새삼스럽지만 당연한 진단이 나온다. 김영호 문학평론가는 “현대사의 질곡과 아픔 겪는 분들이 여전히 많고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단순하게 탄식이나 비통함의 토로로만 전할 게 아닌 현실에서 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를 이어가야 한다”며 “사실 우리나라 서사문학이나 소설같은 경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까닭에 오죽하면 지금을 서사를 잃어버린 시대라고 하는데 한 작가의 노벨문학상은 그 과정에서 하나의 경각심을 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고 기대했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이재영 기자 now@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