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과 무해를 갈망하는 사람들
[충청에서 찾는 ‘트렌드코리아 2025’]
월간 이이김김 신년특집
1. 광복 80주년 다크투어리즘 보고서 Ⅳ
2. 독립운동의 심장 독립기념관에 서서
3. 평범과 무해를 갈망하는 사람들
4. 무해한 것이 힘, 무해력의 힘
5. '무해력' 만들어본 김세영 기자
어려서부터 우리는 평범한 사람보다 성공한 사람이 되길 강요받았다. ‘1만 시간의 법칙’,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듯 노력 없는, 포기하는 태도를 사회는 게으른 아이로 묘사했다. 쏟아지는 성공신화 속 우리는 뒤처지지 않도록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나 어느새 한국은 저성장과 경제 불황으로 평범함조차 꿈꾸기 힘든 세상이 돼 버렸다. 사람들은 과거 등한시했던 보통의 하루를 꿈꾸게 됐으며 쓸데 없는 것으로 불려왔던 무해함을 좇게 됐다. ‘성공’이 아닌 ‘나의 작은 일상’에 집중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돼서다. 이것이 바로 ‘트렌드코리아 2025’가 올해 키워드로 ‘아보하’와 ‘무해력’을 꼽은 이유이며, 기자가 많은 키워드 중 두 단어를 집중 조명한 까닭이다.
경제불황과 심해지는 사회갈등에 긁힌 MZ
‘소확행’보다 아주 보통의 하루를 꿈꾸며
작거나 귀엽고 해롭지 않은 無자극을 좇다
#. 아보하
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방가방가’, ‘하이루’와 같은 인사말을 연상케 하는 이 단어는 굉장히 평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늘여서 ‘아주 보통의 하루’인데 이는 최근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으로 꼽힌다. 행복에 대한 강박이 한국 사회 저변에 깔려있다고 할 정도로 긍정과 즐거움을 추구했던 과거와 달리 ‘무난’하고 ‘안온한’ 삶을 가치 있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끊임없는 경쟁과 사고, 재난, 전쟁 등 자극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시대상이 반영된 키워드다.
누군가는 아주 보통의 하루를 보내고자 하는 이들을 지쳤거나 욕심 없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전혀 아니다. 이들은 외려 아무 일 없는 하루를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최근 사회적 문제로 부상한 묻지마폭행과 살인, 피해 사실 인지와 가해자 특정조차 어려운 딥페이크 성범죄, 평안한 일상을 아무 예고 없이 위협한 비상계엄 선포 등. 우리는 불행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무탈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더 대단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다. 또 역설적으로 아주 보통의 하루를 보내고자 하는 염원이 그런 하루를 보내는 것조차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기도 한다. 건강한 사람이 사고 또는 질환으로 병원을 방문하기 전까지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듯이 말이다.
이런 시대상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책은 ‘아보하’가 뜨기 전 ‘소확행’이 있었다고 말한다. 소확행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줄임말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을 뜻한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가 매년 선정하고 있는 2018년 대한민국 소비트렌드에 뽑히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저성장 고물가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이 주택 구입, 취업, 결혼 등에 어려움을 겪으며 더 이상 크고 불확실한 행복을 좇지 않게 되면서다. 현실의 벽에 못 이겨 소박한 행복을 좇던 청년들이 결국 이마저도 내려놓은 이유는 SNS 등의 미디어 피로감으로 볼 수 있다. 마케팅 용어로 상업화된 소확행이 어느 순간 ‘약간 비싸지만 지불 가능한 가격대의 제품이나 서비스’라는 의미로 변질돼서다. 경쟁적인 SNS 과시가 소확행의 종말을 초래한 것이다. 소확행의 종말과 함께 찾아온 또 다른 삶의 추구미 아보하. 미지근한 물이 체온과 가까워 몸에 좋듯 미지근한 삶의 태도 또한 많은 이들의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염원한다.
#. 무해력
누구나 어릴 적 길을 걷다 발견한 네잎클로버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을 것이다. 다수의 세잎클로버 사이 외골수처럼 피어나 있는 네잎클로버는 유심히 들여다봐야 찾을 수 있다. 발견 즉시 보물을 찾은 것 같은 희열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어디에 뒀는지조차 기억 못 하는 네잎클로버에 우리는 왜 그렇게 열광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단순히 ‘행운’이라는 상징 때문만이 아니다. 기자는 그 이유가 ‘트렌드코리아 2025’가 선정한 ‘무해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작거나 귀엽거나 서툴지만 순수한 것들이 사랑받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해롭지 않고 자극이나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며 굳이 반대하거나 비판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무해함으로 범주화하고 이렇게 무해한 사물들의 준거력이 강해지는 현상을 ‘무해력’이라 부르고자 한다.”
무해력을 가진 대표적인 존재로 아기, 동물, 미니어처, 이모티콘, 판다 푸바오 등을 꼽을 수 있다. 모아 놓고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지 않고, 어떤 대상보다 우월하다는 안도와 통제감을 확인시켜 준다는 점이다. 책은 가족의 친밀감과 사회적 유대가 갈수록 옅어지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통제감이 한층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회적 권력관계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젊은이들이 더 귀여운 것을 선호하는지도 모른다고. 뭐, 이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 당초 귀엽고 무해한 것들은 사랑 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을 분비시키고,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 수치를 낮춰준다고 알려졌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무해한 존재들을 단지 ‘부정적인 것의 부재’로만 인식해선 안 된다. 그것이 중요해지는 시대적 배경과 그 특성을 적확하게 파악할 때 비로소 무해력을 활용한 효과적 대응이 가능하다. 지금의 시대는 저성장이 고착돼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낙관조차 쉽지 않다. 저자는 이것을 고도성장기에 청춘을 보냈던 기성세대와 MZ세대로 통칭되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이라고 설명한다. 지금의 현실은 아무리 노력해도 부유한 집에서 멋진 외모를 갖추고 타고나지 않는 한 신분 상승은 불가능하다는 격차감이 큰 것이다. 여기에 다년간 지속된 코로나19 사태가 불길에 기름을 끼얹듯 상황을 악화시켰다. 정치적 이념 대립은 갈수록 격심해지고 성별 간의 반목도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SNS 등의 발달로 디지털 피로도도 극심하다. 정말 살기 힘든 세상이다. 각종 플랫폼과 디바이스마다 정보가 과도하게 넘치면서 올바른 선택을 했는가에 대한 의심도 늘어간다. 어쩌면 저자극에 대한 수요 급증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무해력이 유해한 세상에서 한 줌의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생존 비결이 된 것이다.
김세영 기자 ksy@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