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칼럼-길을 걷다] 세 번의 을사(乙巳)년
올해는…
10개의 천간(天干)과 지지(地支) 12개가 차례로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간지 60개를 줄여서 ‘육갑’이라고 한다. 올해 을사년은 그 42번째. 1965년 을사년에 태어난 분들은 환갑이 되는 동시에 생애 처음으로 다시 을사년을 맞게 되었다. 1905년생으로 120세가 되는 장수 어르신들로서는 두 번째 을사년이 되니 감회기 남다를 것이다. 지금까지는 120년을 사는 것이 흔치 않아 생애 단 한번 60세에 자신이 태어난 해를 새롭게 맞이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두 번 경험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1905년
을사년이라면 1905년, 을사늑약(勒約)이 먼저 떠오른다. 형식적으로는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것이지만 이미 실질적인 식민지배가 본격화된 상황에서 5년 뒤 경술국치로 이어지는 국권 침탈의 어두운 역사가 시작된 그 해였다. 을사늑약을 예전에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명칭으로 학교에서 배웠다. 아무 생각 없이 공식 외우듯이 ‘을사보호조약’이라 기억했다. 누가 누구를 보호하기 위한 조약이란 말인가. 군사정권 시절 ‘군관민(軍官民)’이라는 용어도 아무 생각 없이 따라썼다.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수해나 가뭄, 폭풍 또는 어떠어떠한 재난을 이겨냈다는 대한뉴스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가 새삼 귓가를 맴돈다. 이즈음 특히 정치인과 공무원들의 ‘국민이 우선이다’, ‘국민들께서 크게 걱정하시고…’라는 워딩을 들으며 상전벽해를 실감한다.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습득하면 아무 생각 없이 머리에 입력되어 조건반사적으로 되뇌이게 되기 때문일까. 지금 생각하니 과거 얼토당토않은 인식, 문구, 용어가 사회에 회자되어 국민의식을 호도, 세뇌하지 않았던가 싶다.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제강점의 물꼬를 튼 부끄러운 역사의 한 장을 ‘보호조약’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표현으로 불러왔던 지난날이었다. 나라 힘이 약한 틈을 타서 일본제국주의의 주구가 되어 매국에 앞장섰던 을사5적 같은 무리들이나 사용했을 법한 표현이 광복 후 수십 년 동안 우리 땅에서 통용되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2025년 을사년에 다시금 깨우친다.
1545년
을사늑약으로부터 꼭 360년을 거슬러 올라간 1545년, 을사사화라는 조선시대 흑역사의 한 대목을 만난다. 인종과 명종시대 외척세력들이 대윤(大尹), 소윤(小尹)으로 나뉘어 숙청과 반격의 당쟁을 벌였던 소모적인 다툼이었는데 훈구, 사림파의 득세, 몰락에 따라 인재들이 대거 희생되었던 사화(士禍)는 을사년이라는 명칭에 또 한 겹의 그늘을 씌웠던 것이다.
1965년
1965년 을사년, 1950년대 초반부터 진행되었던 한일 간의 국교정상화 작업이 1961년 군사정변 이후 급진전을 이루며 이 해 타결되었다. 불평등, 굴욕적인 협정내용으로 후일 끊임없는 갈등의 단초가 될 것이라며 한일회담 반대 여론이 사회 각계에서 비등한 가운데 1965년 6월 22일 조인되었다. 특히 학생들이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는데 어린 시절 보았던 가두투쟁 광경이 지금도 희미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2025년 을사년
이제 21세기 첫 을사년을 맞이했다. 조선시대 1545년의 을사년, 20세기 들어 1905년, 1965년 두 번의 을사년이 우리 역사에서 밝고 역동적인 페이지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2025년 을사년은 이런 어두웠던 을사년의 잔재를 털어버리고 새롭고 긍정적인 도약의 한 페이지로 기록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몇 세기가 지난 다음 후손들이 2025년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아볼 때 그 이전 을사년에 비하여 확연하게 구별되는 빛나는 연보, 민족 자긍심을 확인할 수 있는 연대기로 기억되기를 소망한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