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 2] 240. 국부기념관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2025-01-07     금강일보
▲ 국부기념관 전경

대만에서는 국립고궁박물관, 국립 중정 기념관, 용산사(2024년 12월 11, 18, 25일 자 참조), 국립 국부기념관(國父紀念館)을 ‘타이베이 4대 관광코스’라고 하는데, 국부(國父)란 1912년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최초로 민주공화국을 세운 초대 총통 쑨원(孫文:1866 ~1925)을 말한다. 청이 영국과 아편전쟁(1840~1860)에서 패하자, 멸망 흥함을 내세우며 태평천국의 난이 벌어졌으나 연합군의 북경 점령으로 국운은 풍전등화 신세였다. 쑨원도 이민족인 청 통치에 반대하여 한족을 부흥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만주족을 몰아내자는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 등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내세웠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을 세운 그는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데, 현재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중국공산당도 마오쩌둥(毛澤東:1893~ 1976)을 국부라고 한다. 하지만 대만 정부와 사상과 이념이 다른 중국공산당도 쑨원의 삼민주의를 계승하여 건국기념일에는 천안문광장에 그의 초상화를 내걸고 있다. 쑨원은 '현대 중국의 아버지'로 부를 만큼 모든 중국인이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중산공원

타이베이 시내에서 MRT 5호선(군청색)을 타고 국부기념관 역에서 4번 출구를 나서면 국부기념관인데, 이곳은 타이베이 시청과 타이베이 랜드 마크인 ‘타이베이 101타워’가 있는 번화가이다. 진과스와 지우펀을 관광하고 타이베이 시내로 돌아오던 우리 가족은 중산공원(中山公園) 입구에서 내렸다. 중산은 쑨원의 아호인데, 중산공원이 국부 기념관을 빙 에워싸고 있어서 국부기념관은 중산공원의 한 부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고색창연하고 푸른 기운이 넘쳐흐르는 중산공원의 중앙에는 인공 연못 추이후 호(翠湖)가 있고, 호수에는 구름다리 샹산차오(香山橋)가 정자 쭈헝팅(卒亨亭)과 연결되어 있다.

국부기념관 정원

1968년 3월에 착공하여 1972년 5월에 준공된 국부기념관은 11만 5500㎡(약 3만 5000평)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로서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를 기리는 중정 기념관(1980년 4월 준공)과 마찬가지로 정면은 물론 좌우 출입문으로 출입할 수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다.

쑨원 야외 동상

중정기념관의 약 1/3 정도인 국부기념관 광장의 아름다운 화단이 시민 공원 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는데, 정원 곳곳에 쑨원의 좌상, 입상, 흉상이 설치되어서 시민들은 그 옆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다. 국부기념관 광장에서 대각선으로 타이베이 101 타워를 바라볼 수 있는 포토존으로도 유명하다.

국부기념관에서 본 101타워

국부기념관에 들어서면 넓은 홀에 쑨원이 의자에 앉아 있는 대형 동상이 있다. 쑨원의 동상은 중정기념관의 장제스 동상과 마찬가지로 높이가 6.3m라고 하지만, 중정기념관에서 장제스의 동상이 89계단을 올라간 3층 건물의 넓은 홀에 좌정한 것과 달리 쑨원의 동상은 1층 홀에 설치한 것이 권위적이지 않아서 보기 좋다. 이곳에서도 중정 기념관과 마찬가지로 매시 정각에 근위병 교대식을 벌이고 있는데, 병사들의 기계적인 동작에는 절도 있는 모습이라기보다는 대만이 여전히 통제 사회인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실망스럽다.(2024. 12. 18. 국립 중정 기념관 참조) 국부기념관 뒤 건물에는 2500석 규모의 대회당, 쑨원의 발자취를 알 수 있는 쑨원 사적전, 혁명 건국사적전, 국가건설전, 대륙실황전 등 쑨원의 업적과 활동을 보여주는 상설전시실이 있다. 대회당은 국내외 문화 예술 행사 장소로 쓰이고, 특별전시실은 중국·서양의 서화전, 상공업 특별전, 학술·문화 강좌 등의 행사를 개최한다. 그밖에 30만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 중산도서관이 있다.

국부 동상

1866년 광둥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쑨원은 서당에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다가 14살 때 하와이로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세 때 귀국했다. 그는 전통 유교문화와 서구민주주의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다가 홍콩으로 가서 의학 공부를 했다. 홍콩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마카오, 광저우 등에서 잠시 의사로 활동했는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무기력하게 패하고 서구 열강의 침탈이 가속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는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기치로 하는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했다. 이듬해인 1895년 10월 광저우에서 군사를 일으켰지만, 부하의 밀고로 실패하자 일본으로 달아났다. 그는 하와이를 거쳐 영국으로 갔으나, 1896년 런던에서 체포되었지만, 다행히 홍콩 의과대학 시절 스승의 도움으로 풀려난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서 1900년 2차 무장봉기를 시도 했지만, 이 거사도 실패하여 하와이, 베트남, 미국 등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도쿄에서 유학생과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총리로 추대되었다. 귀국한 그는 1911년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하자, 17개 성이 이에 호응했다. 지지 세력에 고무된 쑨원은 난징(南京)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912년 1월 1일 정식으로 총통에 취임하여 중화민국을 출범했다. 이것이 신해혁명이다. 대만 정부에서는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10월 10일을 중화민국 건국일(雙十節)로 정하고 국경일 행사를 벌인다. 그러나 북경에서는 여전히 청 왕조가 존재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 1916)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근위병 교대식

청의 군대에 비해 무장 세력이 너무 약한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청의 선 통제를 퇴위와 내각제 시행을 조건으로 정권을 넘겨주었지만, 위안스카이가 약속을 어기고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쑨원은 이에 대항했으나 실패하여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자, 귀국한 그는 1919년 5월 4일, 베이징에서 대학생이 벌인 5·4 운동을 지켜보면서 소수의 지식인이 아닌 국민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확장 개편했다. 5·4운동 이후 소련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중국공산당도 결성되어 모택동의 공산주의와 쑨원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쑨원의 광둥 신정부는 혁명 완수를 위하여 군벌을 축출하는 세력을 키우려고,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우고, 장제스를 초대 교장으로 삼았다.(2024.12.18. 국립 중정 기념관 참조)

쑨원 사적실

1924년 쑨원은 대륙을 침략한 일제를 먼저 격퇴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과 1차 국공합작하고, 이듬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러 북경으로 가던 중 풍운아 쑨원은 간암으로 죽었다. 그 뒤를 장개석이 승계하였지만, 부패한 국민당 정부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1949년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한 뒤 대만으로 쫓겨 갔다. 이후 장제스는 대륙 수복을 지상목표로 삼았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75년 4월 눈을 감았다. 

상설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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