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생명보다 우선인 택배물건들
김세영 취재2부 기자
주말 오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신호 대기 중인 한 택배차량에 시선을 뺏겼다. 때가 낀 하얀 택배차량 후미에 노란색 글자 스티커가 붙어있었는데 내용이 무척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기사 위급 시 택배부터 배송’? 웃고 넘기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아이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붙여놓은 ‘아이 먼저 구해주세요’도 아니고, 택배부터 배송해달라니. 생명보다 소중한 물건이 있다던가. 혹여 ‘택배공화국’이 된 현실을 비판하고 싶은 건 아닐까 하는 호기심도 뒤따랐다.
얼마 안 가 바뀐 신호 탓에 해당 택배차량을 놓쳤다. 찰나의 기억이 뇌리에 각인돼 며칠을 궁금증에 시달렸다. 수소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차 번호판만으로 택배기사 찾기가 시작됐다. 그 시작은 노동단체였다. 택배노조 지역본부까지 들쑤셨으나 돌아온 건 반발심이었다. “어떤 몰상식한 놈이 그런 문구를 붙이고 다니느냐”는 게 분노의 요지였다. 더 찾아봤만 발견하면 연락을 주겠다는 답변 뿐이었다.
그래서 또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간 ‘배송이 완료됐습니다’라는 문자를 남겼던 택배기사들에게 직접 물어봤다. 적잖게 이사를 다닌 덕에 여러 명의 택배기사 연락처가 남아있었는데 아쉽게도 허탕이었다. 마찬가지로 다들 본 적이 없다는 답변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택배기사를 찾으러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를 지속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동네에서 마주친 만큼 다음에 발견한다면 기필코 쫓아가 연락처를 받아내리라. 받아서 그 스티커를 붙인 이유 내지 동기가 무엇인지 꼭 알아내리라 다짐했다.
약 한 달이 지나 기억이 희미해진 21일. 우연히 그의 소식을 접했다. 택배차량을 수소문한 노조에서 신원을 확보한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택배기사는 청년이고 그냥 유머로 스티커를 붙였더랬다. 좋지 않은 인식을 심어줄 수 있으니 그 스티커를 제거하는 게 어떠냐 권고했단다.
단순 해프닝으로 일단락됐지만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 얼굴도 모르는 택배기사 덕에 그간 몰랐던 많은 노동자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몸을 갈며 일하는 노동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매일같이 택배노동자를 새벽배송으로 내모는 세상과 마주하게 됐다. 이놈의 오지랖에 ‘택배공화국’이란 현실에 대한 조소 섞인 글자 스티커를 떼게 될 위기에 처한 그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모쪼록 모든 노동자가 다치지 않고 일할 세상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