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이이김김] “내 하루 일정 짜줘”
토요일 아침 7시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사실 알람을 켜도 알람 소리에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슬픈건지 다행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하루 살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INTJ답게 계획된 하루를 시작한다.
AI가 짜준 스케줄은 ‘갓생’과 ‘힐링’ 사이
운동으로 시작해 산책으로 끝나는 하루다
혼밥인 탓에 위로가 되지 못하는 집밥이나
카공족 사이 카페타임은 서글픔 느끼게 해
MZ세대지만 갓생을 추구하는 나는, 생전 처음 아침에 스트레칭으로 몸을 깨웠다. 정신을 깨우고 꾸역구역 헬스장으로 향했다.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흘리며 유산소 운동을 시작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헬창’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나 역시 그들처럼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다. 그러나 술에 빠져 사는 요즘 그 꿈을 이루기란 먼 나라 얘기다. 슬프다. 운동 중에 ‘헬창’들이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눈치가 보인다. 나는 아직 ‘헬린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AI는 내게 오전부터 좌절을 안겼다.
9시 30분쯤 집으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었다. 배달음식이 일상이 된 시대지만 집밥만큼 위로가 되는 것도 없다고들 한다.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집밥이 트렌드로 떠오른 것도 이런 이유일 게다. 어느 덧 자취도 13년차. 혼밥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혼자서 밥 먹는 게 자연스러워졌다는데 난 가끔은 밥상에 혼자 앉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10시부터는 독서를 하란다. AI는 읽어야 할 책도 콕 짚었다. 민주주의 관련 서적. 뭐 독서는 나름 만족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쇼츠 영상에 빠진 세대라지만 여전히 책장을 넘기는 아날로그적 감성도 소중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이 온다. 몇 장이나 넘겼을까. 다 읽고 싶었던 욕망은 어느 순간 사라진 채 쇼파에 등을 기댄채 졸았다. 이게 현실이다. 역시 독서는 힘들다.
정오가 되자 다시 집밥으로 에너지를 채웠다. AI가 자꾸 집밥만 먹으라니까 살짝 짜증이 난다. 밥상 차려내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AI는 모르나보다. 뭐 휘게(Hygge) 라이프가 유행이라나 뭐라나. 북유럽식 안락함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포털 사이트에 치니 요란하게 설명을 하던데 난 잘 모르겠다. 배고프면 먹고, 아님 말면 될 일을 참 이런저런 핑계들이 많다.
오후 1시 봄볕 아래서 세차를 하러 떠난다. 그래, 요즘 뽀얗던 차가 쾌쾌묵은 먼지를 뒤집어 썼으니 이때쯤 세차를 해야겠다 싶던 차였다. 차를 닦으며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라고 AI는 내 생각까지 지배하려 든다. ‘거기까진 아니야, 너 좀 자중해’라는 핀잔을 기계에 던지면서 팔 근육의 핏줄이 올라오도록 차를 닦아낸다. 그때쯤되니 자연스레 고민도 사라지는 마법에 걸렸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오롯이 하나의 일에만 집중하는 시간. 세차를 하면서도 ‘이 차가 나를 배신하지 않기를’ 기도하며 나도 모르게 차에 대고 ‘너는 나의 유일한 친구’라고 중얼거려 본다.
AI는 세차를 마치고 난 오후 3시에 카페로 나를 인도했다. 사실 카페가서 할 게 없다. 노트북을 펼치고 기사 정리를 시작했다. ‘뭔가 서글프네.’ 그러는 동안 옆자리에서는 누군가 취업 준비를, 또 다른 이는 자격증 공부에 열중이다. ‘카공족’이라 불리는 우리 세대의 일상이 보이는 듯하다. 오후 5시 무렵에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AI에게 ‘저녁은 뭘 먹을까’ 물으니 양식을 추천한다. 딱 질색이다. 그러곤 집밥 대신 배달 애플리케이션으로 과감히 비빔밥을 시켰다. ‘비록 AI에 의지해 하루를 사는 것이 미션이겠으나 의지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리.’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양식보다 한식이 최고다.
밤 8시엔 차를 몰고 갑천으로 향했다. 산책 시간이라고 AI는 내게 걷기를 강요한다. 차를 산 이후 걷는 게 더 귀찮아졌는데 신경질이 머리 끝까지 날 때쯤 그나마 대전의 야경이 물에 비치는 모습이 눈을 사로잡는다. 문득 우리 세대는 왜 이토록 힐링을 갈구할까, 힐링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가끔은 힐링이 필요하다는 걸 잊고 지내는 것 같다는 상념에 잠긴다. 한 시간 반 정도를 걷고 또 걷다보니 다시 차 앞에 도착했다. ‘이제야 끝이구나.’ AI는 미안했는지 이제야 내가 원하던 스케줄을 짜준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OTT로 밀린 드라마 보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AI는 오지랖을 부린다. 아이유와 박보검의 새 드라마를 보란다. 로맨스는 내 스타일이 아닌데…. 1화를 중간쯤 보다 과감히 OTT를 꺼버렸다. 역시 내 스타일이 아니다.
우리는 갓생을 추구하면서도 힐링을 찾는다. 완벽한 일상을 꿈꾸면서도, 때론 지친 마음을 달래야 한다. MZ세대의 토요일은 갓생과 힐링 사이를 오간다. 운동과 독서로 자기계발을 하면서도 집밥과 산책으로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이것이 우리 세대만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아닐까.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AI가 짜준 스케줄이 아니라 내 의지더라. 이것이 AI로 하루를 보내며 느낀 나의 굳은 생각이다.
글·사진=이준섭 기자 ljs@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