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경태의 문학산책] 문무를 두루 갖춘 불멸의 영웅 이순신

문화 칼럼니스트·문학박사

2025-04-22     금강일보

최근의 혼란스러운 시국을 맞이하여 우리 충청지역 선배 문인들은 당시의 난국을 어떻게 수습하고 극복했는지 문학산책을 통해 그들의 지혜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불굴의 용기와 헌신, 뛰어난 지략과 창의력, 강인한 리더십과 애민정신을 실천하여 불멸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문학적 활동을 산책하고자 한다.

 ◆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

이순신의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공, 본관은 덕수이며, 1545년 양력 4월 28일 서울 건천동에서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초계 변씨 사이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은 신(臣)자 위에 중국의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 요, 순, 우 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의 가문은 4, 5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이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해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는 가세가 기울어져 있었다.

이순신이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 시절에 어머니 변씨의 큰 영향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져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래서 4년 뒤인 1576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처음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관직에 나간 뒤 얼마 되지 않아 모함으로 백의종군한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정읍현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에서 촬영한 충무공 이순신 표준영정.

이순신은 오직 백성과 자신의 공적 업무만 아는 '원칙장교'였기 때문에 그의 하급 무관 시절은 늘 불우했다. 먼 친척이었던 같은 덕수 이씨 율곡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한번 만나자고 해도 "율곡이 인사권을 맡아보는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찾아갈 수가 없다"라며 사양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산 앞바다와 한산도 등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치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고, 이순신은 또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고, 원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두 번째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런데 원균이 이끌던 수군이 거제에서 전멸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였다.

그 무렵 남은 것은 군사 120명과 배 12척뿐이었다. 충무공은 이 열악한 재원으로 명량해전에서 크게 승리하고, 1598년 11월 19일, 퇴각하는 왜선 500척을 노량에서 맞아 궤멸시켰으나 이 싸움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 세계기록유산 『난중일기』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에 전시된 유물 어느 것 하나 귀하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중 『난중일기』는 보배 중의 보배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노벨문학상이 있었다면 이순신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순신이 내 마음속 불멸의 영웅이어서가 아니라 충무공의 『난중일기』는 객관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윈스턴 처칠의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과 비교해 한치도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영상 속 난중일기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에서 촬영한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 음력 1월 1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음력 9월 17일까지 2,539일간의 군 생활과 전란의 정세와 개인의 사생활을 적은 일기이다. 『난중일기』라는 제목은 이순신 사후 200년이 지나고 정조 때 왕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할 때 붙였다. 원래에는 『임진일기』, 『계사일기』, 『을미일기』 등으로 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전시에 지휘관이 직접 작성한 기록물로, 당시 동아시아 국제전쟁의 전투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며, 당시의 기후, 지형, 서민들의 삶을 상세히 기록한 중요한 연구자료로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쟁 속에서도 독서에 게을리하지 않았음도 보여준다. 중국의 역사책 『송사』를 읽고 느낀 소감을 적었고, 유성룡이 보내준 『증손전수방략』에 대해 뛰어난 이론서라며 칭찬하고, 한국의 옛 역사를 읽고 개탄스럽게 느낀 생각을 일기에 적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계사일기』 1593년 7월 9일에는 광양과 순천이 왜병에게 함락되었다는 비보가 이어지고 난 뒤에 "이날 밤은 바다의 달이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색을 이루었고, 서늘한 바람이 선뜻 불었다. 홀로 뱃전에 앉아 있었고,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라고 썼다.

이에 이순신 장군에 대한 소설 『칼의 노래』(2001)를 쓴 소설가 김훈은 문학으로서의 『난중일기』를 '수식을 배제한 무인다운 글의 전범'이라고 극찬하였다.

이충무공의 『난중일기』는 1962년에 지정한 대한민국의 국보이고, 2013년에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기록유산이다.

현충사 주차장 옆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친필 어록비.

◆ 충무공 이순신의 잠 못 드는 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직접 전쟁에 참전한 장군으로서 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7년 전쟁 동안 일당백의 역할을 묵묵히 담당해야 했다. 충무공도 장군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인간이기에 혼자서 감내해야 했던 죽음과 삶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전쟁 트라우마, 고난과 시련, 번민과 고통 등이 많았을 것이다.

충무공이 이렇게 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백절불굴의 우국충정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이 힘은 바로 일기와 시를 쓰면서 읊었던 문학 활동이 아니었나 한다.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달 창에 들에 칼과 활을 비추네
-이순신, <한산도야음>, 오언절구 번역시

이 시는 전형적인 한시의 오언절구로 전반부는 경치를 묘사하며 시상을 유도하고, 후반부에서는 시인의 감정 또는 삶의 철학을 제시하는 선경후사로 구성되어 있다. 새벽이 되도록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달빛이 칼과 활에 번득이는 비수처럼 파고드는 것을 보고, 무기를 가다듬어 적을 무찌르고자 하는 우국충정이 빛나고 있다.

한편, 『난중일기』(임진 2월. 병신 2월)을 보면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 빛은 비단 같아서 잠을 자려 해도 잠을 잘 수 없다.”라고 낭만적으로 묘사한 것이 20여 일이나 될 정도로 충무공은 달빛 바다를 보며 망중한을 즐겼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가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한산도가>, 시조 전문

이 <한산도가>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에 나타난 하늘과 바다 그리고 섬이 ‘수루에 혼자 앉아’ 있는 장군의 번득이는 칼끝으로 수렴되면서 공간이 더 축소되고, 뚜렷한 초점이 형성되며 긴장감이 더욱 고조된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 소리’가 ‘깊은 시름하는’ 장군의 가슴에 들어와 변환과 융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어구 ‘남의 애를 끊나니’에서 공의 우국충정을 담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시인 자신과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면서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2024년 7월에 촬영한 현충사 전경.

◆ 충무공의 유적지 현충사와 그의 묘

지난 4월 초 이충무공 탄생 480주년을 맞이하여 이순신을 다시 조명하고자 현충사를 탐방했다.

정문을 지나면 자연 친화적인 충무공 기념관이 나오고 이를 지나면 충무문과 현충사 사당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으며 그 오른쪽에는 이순신을 비롯하여 이완, 이홍무, 이봉상, 효자 이제빈의 정려 현판이 있는 정려, 왼쪽에는 1932년에 '이충무공유적보존회'가 결성하여 1868년 헐렸던 현충사를 다시 짓고 사액 현판을 다시 걸은 구 현충사가 있다. 그리고 교차로 지나 중앙에 홍살문과 충의문 현충사가 있고, 오른쪽에 충무정, 활터, 고택, 이면 공 묘소 등이 배치되어 있다. 언제 보아도 잘 정돈된 현충사이다.

이순신은 서울에서 태어나 소년기에 어머니 초계 변씨의 친정이 있는 아산 백암리(현충사가 있는 마을)로 이사했다. 이순신은 21세의 나이에 보성군수를 역임한 방진의 무남독녀인 방씨와 결혼하였다. 따라서 순신의 처가가 자연히 상주 방씨(온양 방씨)이고, 현재 남아 있는 현충사 경내의 충무공 고택은 이순신이 결혼하여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전통적인 한식 목조 건물인 안채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집 뒤편에는 이순신의 위패를 모신 가묘가 있다.

한편, 명량해전에서 참패한 왜적들은 그 보복으로 아산에 찾아가 이순신의 고향 집은 물론이고, 온마을에 불을 질렀다. 이때 장군의 셋째 아들 면은 고향 집에 침범한 왜군과 맞서 싸우다 21세의 나이로 장렬하게 전사했고, 그 면의 묘소가 고택 옆에 있다.

그리고 현충사 맨 위 중앙에 공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진 현충사가 있다. 우리 일행은 현충사에 참배를 끝내고, 서북쪽으로 9㎞ 떨어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서 영면하고 있는 이충무공 묘를 찾아 또다시 참배하였다.

이충무공 묘 전경. 각종 석물과 곡장이 남다르다.
이충무공 고택 안채 모습
이충무공 고택 앞의 홍매화
이충무공 고택 장독.
이충무공 고택에서 공의 위패가 모셔진 가묘 가는 길.
이충무공 묘 앞에 있는 연못. 동양의 전통적인 천원지방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이충무공 묘 앞에 있는 홍살문
이충무공 묘 입구에 있는 재실 충무재 전경
이충무공 묘 입구에 있는 재실 충무재
이충무공 묘와 오른쪽 앞에 있는 정조의 어제신도비
충무공의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
충무문 담장 아래에 있는 타루문
현충사 경내에 있는 구현충사 전경. 기둥의 주련은 정인보 선생의 충무공 추도시이다.
현충사 경내에 있는 이충무공 고택
현충사 경내에 있는 충무공 가족 정려
현충사 내삼문 격인 충의문 사이로 보이는 현충사.
현충사 내삼문 격인 충의문

 

방경태 문화 칼럼니스트·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