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亞 최초 교황’ 충청에서 탄생하는 기적 일어날까

역사적 무대 오른 유흥식 추기경 47년 만에 콘클라베 투표 참여 동시에 교황 후보군에 이름 올려 평화·통일 문제 등에 관심 두고 대전교구의 변화와 성장 이끌어 프란치스코 교황 뒤이을까 기대

2025-04-23     이준섭 기자
유흥식 추기경. 금강일보 DB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1일(현지시간) 선종하면서 세계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 다시 한 번 요동치고 있다.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Conclave)가 조만간 소집될 예정인 가운데 충청 출신의 유흥식(라자로) 추기경이 그 역사적인 무대 한복판에 선다. 천주교 대전교구장을 지냈고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재임하고 있는 유 추기경은 현재 세계 135명의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 중 한 명일 뿐만 아니라 교황 후보군에 포함됐다.

대전서 시작한 여정, 로마로
가톨릭 교회의 역사는 2000년에 달하지만 아시아 출신 교황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더 좁혀보면 한국인이 교황 후보군 중심에 서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 충청도 출신의 한 인물이 그 문턱 앞에 다가서 있다. 1951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유 추기경이 그 주인공이다. 유 추기경은 대전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한 뒤 로마로 유학을 떠나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79년 사제품을 받고 사목과 교육, 교구 행정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아 왔다. 2005년부터는 천주교 대전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지역의 평화·통일·사회적 약자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특히 네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 남북 종교 교류에 앞장선 건 가톨릭계에서 꽤 드문 이력이다.

2021년 유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에 임명됐다. 성직자부는 교황청 행정 체계에서 성직자 인사·생활·사목 전반을 총괄하는 자리로 교황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핵심 보직이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22년 유 추기경은 추기경에 서임됐다. 한국인 최초의 교황청 장관, 두 번째 교황 선출권자라는 타이틀을 동시에 지닌 순간이기도 했다.


47년 만에 콘클라베 무대에
대한민국 가톨릭 추기경이 콘클라베에 참여하는 것은 1978년 김수환 추기경 이후 약 47년 만이다. 김 추기경 이후 교황 후보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던 인물은 없었다. 정진석 추기경조차도 나이 제한으로 불참했고 그 뒤로도 한국 가톨릭은 세계 교회 정치의 무대에서는 조용한 그림자 속에 있었다.

그러나 유 추기경은 현재 만 73세로 교황 선출권을 가진 80세 미만에 해당한다. 또 콘클라베에 참여하는 추기경단 중 실질적인 교황 후보군에 포함된 몇 안 되는 아시아계 인물 중 하나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는 유 추기경을 차기 교황 유력 후보 12인에 포함시켰고 ‘남·북한 화해를 모색한 포콜라레 운동의 일원’으로 소개하며 국제적 평화 인사의 상징으로 평가했다.

교황이 탄생하는 순간
콘클라베는 ‘함께(cum)’와 ‘열쇠(clavis)’라는 라틴어의 합성어로 ‘열쇠로 잠근 방’이라는 의미다. 말 그대로 철저한 비밀 속에서 진행된다.

모든 추기경은 시스티나 성당으로 입장하며 외부와의 소통이 완전히 차단된다. 도청·녹음 장치를 방지하기 위한 정밀 수색이 이뤄지고 선거를 위한 보조 인력들도 모두 비밀 서약을 한다. 시스티나 성당 안에서는 매일 오전과 오후, 하루 두 차례 투표가 이어진다.

당선자는 전체 유권자의 3분의 2 이상을 득표해야 한다. 투표 후에는 투표용지를 굴뚝에 태워 연기를 피우는데 흰 연기는 교황 선출을, 검은 연기는 부결을 뜻한다. 이번 콘클라베는 교황청 카사 산타 마르타 숙소에서 숙식을 함께 하면서 진행되며 철저한 폐쇄성과 경건함은 현대 민주주의 선거와는 또 다른 차원의 의식으로 여겨진다.

그 속에서 기대를 모으는 건 유 추기경, 그가 가진 ‘충청’이라는 가능성이다. 유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다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역사적인 사건이다.

특히 충청권에서 그 의미는 남다르다. 유 추기경은 대전교구를 기반으로 목회해 왔고 천주교 대전교구의 변화와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충남 논산 출신인 유 추기경의 인간적 뿌리도 충청에 깊게 닿아 있다.

게다가 유 추기경은 신학적으로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발언해 왔고 권위주의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적 면모와 상당 부분 궤를 같이하는 대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년까지도 강조해온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 ‘주변부에서 중심으로’라는 비전이 유 추기경에게 그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하베무스 파팜’의 그 순간
“하베무스 파팜(Habemus Papam·우리에게 교황이 있다).” 이 선언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코니에서 울려 퍼지는 순간 그 자리에 유 추기경이 서 있다면 그것은 단지 한 명의 종교 지도자가 탄생하는 장면이 아니다. 2000년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인이, 한국인이 교황이라는 이름으로 인류 앞에 서는 전환점이다. 동시에 대한민국 교회의 성장과 성숙, 충청이라는 지역의 상징적 도약, 그리고 아시아 가톨릭 전체의 새로운 가능성이 복합적으로 응축된 역사적 선언이 된다.

가톨릭의 세계 정치와 신학 담론은 오랜 세월 유럽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대한민국 교회는 그 바깥, 언저리에서 조용히 신앙을 키워왔다. 순교의 역사로 시작해 산업화와 민주화의 시대를 지나며 신자수 600만 명이라는 내실 있는 교회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그 주변부에서 걸어 나온 충청의 한 사제가 세계 추기경들의 선택을 받아 교회의 중심에 선다면 단지 한 사람의 승진이 아니라 대한민국 교회가 교황청의 문을 두드린 것이며 동시에 그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유 추기경이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날 그 발걸음은 충청의 도시 논산에서 시작돼 로마의 심장부까지 닿은 길이다. 그날 ‘하베무스 파팜’은 곧 ‘하베무스 스페람(우리에게 희망이 있다)’이라는 또 다른 선언으로 들릴 것이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