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안전 365] 횡단보도에서도 불안한 보행자, ‘멈춤’이 절실하다

조성미 한국교통안전공단 대전세종충남본부 차장

2025-05-18     금강일보

보행자는 신호등의 초록불을 믿고 길을 건넌다. 그러나 그 믿음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 횡단보도 위조차 안전하지 않은 도시. 지금 이 순간에도 길을 걷는 고령 보행자들은 자신을 향해 회전해 들어오는 차량을 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망설이고 있다.

최근 도로교통공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자 중 65세 이상 고령자 비율은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다수가 신호를 준수하며 횡단보도를 건너다 사고를 당한 경우다. 보행자 신호가 켜졌음에도 불구하고, 우회전 차량이 멈추지 않거나 과속으로 진입하면서 사고가 발생한다.

2023년 7월, 정부는 이러한 사고를 줄이기 위해 ‘우회전 시 일시 정지 의무’를 명시한 개정 도로교통법을 시행했다. 우회전하려는 차량은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있을 경우 반드시 정지해야 하며, 보행자가 없더라도 신호등이 녹색인 경우 우회전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장 체감은 제도보다 한참 뒤처져 있다. 여전히 많은 운전자가 정지선을 무시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서지 않은 채 회전한다. 규정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알더라도 “급하다”, “보행자가 멀리 있다”는 등의 자기합리화로 정지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

고령 보행자에게는 이러한 태도가 더욱 위험하다. 이들은 일반 성인에 비해 보행 속도가 느리고, 주변 인지력도 제한적이다. 특히 복합 교차로에서는 차량의 회전 방향을 예측하거나, 빠르게 반응하기 어렵다. 운전자가 ‘충분히 비켜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리도, 고령 보행자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

이제는 차량 중심 교통문화에서 벗어나, 보행자 중심의 안전 질서를 재정립해야 할 때다. 특히 고령층 보호는 단순한 교통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우리 사회가 반드시 풀어야 할 구조적 과제다.

◆‘정지’ 하나로 생명을 지킬 수 있다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운전자의 인식 전환이다. 법을 지킨다는 차원을 넘어, 횡단보도에 사람이 있을 때 무조건 멈추는 습관을 체화해야 한다. ‘정지’는 선택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기본이다. 이에 더해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다. 먼저, 지자체와 경찰청은 특정 시간대 교차로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 우회전 일시 정지 규정을 위반한 차량에 대해서는 경고 중심의 계도보다 실질적 과태료 부과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둘째, 스마트 교통 인프라 도입도 속도를 내야 한다. 일부 도시에서는 AI 기반 보행자 감지 시스템이 시범 도입되고 있다. 횡단보도 주변에 센서를 설치해 보행자가 접근하면 차량 신호와 연계해 회전을 지연시키거나, 경고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기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문제는 확산 의지다.

셋째, 도로 설계 자체의 개편도 중요하다. 교차로 설계 시 횡단보도와 차량 회전 구간을 물리적으로 분리하거나, 횡단보도를 보도 쪽으로 더 들여 배치함으로써 운전자가 보행자를 조기에 인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걷는 시민이 안심하는 도시

혹시 최근 횡단보도에서 차량이 정지하지 않아 불안했던 경험이 있는가? 고령의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길을 건널 때 걱정한 적은 없는가? 이러한 질문은 개인적인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은 도시의 안전 수준을 점검하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보행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생존권이자 이동권이다. 누구나 길 위에서 멈추지 않고, 불안하지 않게 걸을 권리가 있다. 특히 고령 보행자에게는 사회가 그 안전을 한층 더 책임져야 한다.

교통사고는 단지 운 나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무시한 신호, 가볍게 넘긴 규정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다. 반대로, 하루에도 수십 번 일어나는 ‘멈춤’의 실천이 사고를 줄이고 생명을 지킨다. 초록불을 믿고 길을 건넌 보행자가 끝까지 안심할 수 있는 도시. ‘스마트’한 교통 체계란 기술보다도 시민의식과 책임 있는 멈춤에서 시작된다. 이제는 그 ‘멈춤’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