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잔재 담긴 옛 토지대장…한글화 작업 서둘러야
일본식 연호·창씨명 그대로 남아 조상 땅 찾을 경우 해석 번거롭고 재판·행정소송땐 권리 접근 제한 충남·고양·고흥 등 정비 나섰지만 대전시는 아직 계획 단계 머물러
대전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자체는 현재 토지대장을 전산화해 한글로 발급하고 있다. 하지만 조상 땅을 찾거나 오래된 기록을 들추는 순간 전산 시스템 밖에 남겨진 ‘구(舊)대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원본 토지대장이 그것이다. 그 안에 담긴 언어는 여전히 ‘식민지의 시간’에 머물러 있다.
대전시와 5개 자치구에서 실제 민원 처리에 사용되는 토지대장 대부분은 전산화가 완료돼 있다. 출력하면 한글로 제공되는 것이 보통이다. 문제는 구대장이다. 이 문서에는 일본식 연호나 일본어 조사·창씨명·한자 지명 등이 정비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구대장은 일반 민원인이 요청하지 않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상 땅 찾기나 소송 등 과거 기록이 필요한 경우에는 결국 민원실을 찾아야 하고 여기서부터가 골칫거리다. 일단 구대장은 쉽게 떼어볼 수 있는 문서가 아니다. 지번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는 데다 한자로 쓰인 지명이나 창씨명은 민원인 스스로 해석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그러다 보니 민원실 직원에게 일일이 문의하는 일이 반복되고 관련 업무를 맡은 공무원도 불편을 겪는다. 전산화된 행정 속에서 과거의 언어가 방치된 채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대전의 한 자치구 민원실 관계자는 “일반적인 토지대장은 전산화돼 있어 한글로 나가지만 구대장은 정리가 안 된 원본 상태 그대로여서 설명을 요청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민원인이 지번을 알고 와야 찾을 수 있고 한자나 일본어 표기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 읽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구대장은 단순한 과거 기록이 아니라 지금도 법적 판단의 기준으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조상 땅 소송, 경계분쟁, 행정소송 등 수많은 민원이 구대장 기록 하나에 달려 있다. 기록이 해석 불가능한 언어로 남아 있다면 시민의 권리 접근도 그만큼 제한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이 같은 구조적 문제를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충남도다. 충남도는 지난 4년간 313만 장에 이르는 토지대장을 정비해 한글로 전환하고 디지털로 구축했다. 경기도 고양시는 지난해 말 정비를 완료했고 전남 고흥군도 올해 사업에 착수했다.
반면 대전시는 아쉽게도 계획 단계에서 멈춰 있다. 시는 지난해 토지대장 한글화 정비 사업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지만 본예산에 반영되지 않아 추진이 보류된 상태다. 시 관계자는 “예산이 이번엔 통과되지 않았다. 내년도 본예산에 다시 반영해 추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기록 정비 사업이 행정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적한다. 조상 땅 찾기처럼 일부 민원에 국한된 사안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실제론 재산권 분쟁이나 행정 소송 등 다양한 판단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는 만큼 기록의 접근성과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행정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호택 배재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는 “이런 기록 정비 사업은 실제 수혜자가 특정되다 보니 예산 편성 과정 중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쉽다. 행정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당사자들의 요구나 문제 제기가 있어야만 사업이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진단했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