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죽음’ 충청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 75주년]

2025-06-24     이준섭 기자

   기억되지 않은 민간인 희생자   

전쟁은 총칼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죽음은 기록되지 않으면 공동체의 기억에서도 사라진다. 충청의 산과 계곡, 굴과 숲은 그런 이름 없는 죽음들을 품고 있다. 6·25 한국전쟁, 국가와 이념은 사람을 골라냈고 마을과 가족은 침묵을 배웠다. 아버지가 사라진 자리엔 어머니의 밥상이 남았고 굴다리 아래선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어떤 죽음은 그저 땅에 묻혔고 어떤 이름은 빨갱이라는 낙인으로 조롱받았다. 그때의 침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다시 땅을 파고 누군가는 이야기를 적는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외면될 때 지워진다. 그날의 이름 없는 죽음이 다시 사람의 얼굴을 찾을 수 있도록 이제는 말해야 한다. 충청의 흙 아래 감춰진 진실을 향해 우리는 늦었지만 첫 발을 내딛는다. 이 여정은 단지 과거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를 다시 쓰기 위한 사회적 책임의 시작이다.

 

내 부모, 정든 이웃, 피란민까지 ...
충청의 산, 계곡, 숲속, 굴 아래 묻혔다
그 이름 부르지 못한 채 남겨진 가족들
지울 수 없는 낙인 달고 살아온 삶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고통까지 더해
보훈의 책임, 잊힌 이들에게까지 닿아야

◆ 아버지가 사라진 계곡

대전 동구 산내면 골령골. 하루가 멀다 하고 트럭이 들어섰다. 대전형무소에서 이송된 이들이 그 안에 실려 있었다. 두 손이 등 뒤로 묶이고 눈을 가린 채 줄지어 산속으로 향했다. 이름은 불리지 않았고 재판도 없었다. 총성이 울리고 땅이 덮였다. 보도연맹원, 정치범, 혹은 단지 의심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민간인들이 사라졌다. 수천의 생명이 이 계곡에서 조용히 지워졌다.

골령골은 말이 없지만 눌린 돌 사이마다 단단한 숨이 느껴진다. 수십 년이 흐른 뒤 발굴 현장에서 뼈가 세상 위로 나왔다. 닳은 구두창, 녹슨 단추, 깨진 안경테, 멈춰선 시계가 함께였다. 그것은 시간과 사람, 그리고 침묵의 기록이었다. 하나의 삶을 말없이 삼킨 그 땅은 지금도 발굴 중이며 마주한 사람마다 그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발굴 현장을 찾은 이들은 주저앉듯 서서 오랜 시간 바닥을 내려다본다. 말없이 돌아서는 발걸음엔 오래 묻혔던 슬픔이 묻어 있다.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와 발굴 도구가 부딪히는 소리는 그날의 총성과도 같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식별되지 못한 유해는 침묵 속에서 나라의 정의를 기다리고 있다.

◆ 총을 든 친구들

충북 영동군 노근리. 하늘에서 전단이 떨어지던 날 마을 사람들은 그 지시를 따랐다. 미국이 뿌린 종이에는 ‘이 길로 피난하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주민들은 짐을 꾸려 아이와 노인, 젊은 부부와 함께 철도 아래 쌍굴다리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은 피난처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 다리 위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미군은 경고 없이 사격했고 수백 명의 민간인이 쓰러졌다. 갓난아이를 안은 어머니도, 막 잠이 들었던 노인도 예외는 없었다. 굴다리 앞에 서면 바람이 굴속을 통과할 때마다 어딘가 먼 데서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한민국 정부는 말이 없었고 미국은 ‘유감’이라는 말만 남겼다.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비극의 현장. 금강일보 DB

그해 이후 유족들은 매년 다리 아래에서 초를 켰다. 굴다리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기억의 통로가 됐다. 75년이 지나도 그 자리엔 끝내 멈추지 못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사건을 목격한 마을 노인은 그날 이후 다리 아래를 지나가지 않았고 가족을 잃은 이들은 다리를 돌고 돈다. 무너진 다리 아래에서 멈춘 생의 시간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기념비보다 오래된 침묵은 굴다리 곁에 남아 흐르고 있다.

◆ 잊힌 이름들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입을 다물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마을 옆 숲, 그곳은 누군가 죽어 묻힌 자리였다. 전쟁의 한복판이 아닌 후방에서 일어난 학살에 마을 사람들은 침묵으로 살아남았다. 숲 입구에 멈춰 서면 짙게 엉킨 덤불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수풀 너머에서 무언가 지켜보는 듯한 기운이 밀려온다.

충북 단양 곡계굴도 기억 속의 상처다. 여름 장마를 피해 수백 명의 피난민이 동굴에 들어갔다. 포탄이 굴 입구를 덮쳤고 안의 사람들은 모두 질식하거나 굶어 숨졌다. 국가는 기록하지 않았다. 위령비는 없었고 안내판도 없었다. 그러나 해마다 몇 구씩 땅에서 유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탄흔이 남은 두개골, 맞잡은 손의 유골은 말 없이 묻히고, 말 없이 발견된다. 발굴자들의 손끝에 남은 침묵은 단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징표다. 숲과 굴은 시간을 품은 묘지이자 고요한 증언자였다. 나무의 나이테와 동굴의 이끼조차 당시를 기억하는 듯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다. 그 자리를 지나는 바람조차 무겁고 천천히 흐른다.

◆ 빨갱이의 자식들

전쟁은 삶을 가르고 이름을 뒤바꿨다. 보도연맹은 한때 국가가 조직한 합법 단체였다. 반공 교육을 위한 조직으로 수많은 국민이 권유받아 가입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그 명단은 곧 학살의 목록이 됐다. 군경은 그들을 일괄 체포했고 재판 없이 총살했다. 죽음은 ‘보안상 필요’라는 행정 용어로 정리됐고 시신은 암매장됐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말할 수 없었다. 가족관계등록부에서 이름을 지우고 사진첩에서 얼굴을 뺐다.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은 아이들에게까지 전가됐다. 학교, 군대, 직장, 결혼, 모든 삶의 순간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유족의 집 거실 벽엔 누군가의 누락된 사진 자리가 비어 있었다. 희생자들은 현충원에 가지 못했다. 무연고 봉안당, 이름도 없는 골함에 들어갔다. 낙인은 오래 지속됐고 공동체는 그들 편에 서지 않았다. 사죄받지 못한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 낙인은 침묵보다 더 깊은 상흔으로 남아 오늘까지 가족들의 삶을 흔들고 있다. 가족은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 남겨졌고 사회는 그 아픔을 나누지 않았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고통은 가장 깊은 상처가 된다.

◆기억하지 않으면 되풀이된다

진실·화해위원회가 골령골과 당진, 천안, 부여의 땅을 열고 있다. 삽이 땅에 박힐 때마다 침묵했던 유해들이 얼굴을 드러낸다. DNA 감식을 통해 일부는 이름을 되찾았지만 대부분은 무명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추모공원 사업은 지연되고 있다. 예산과 타당성 조사, 행정 절차는 명분이 됐다. 골령골 ‘진실과 화해의 숲’이라는 이름 아래 아직 그 어떤 시설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족들은 공간이 아니라 책임을 원하고 있다. 침묵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이제 묻고 들어야 한다. 그곳엔 평범한 시민들이 현장을 답사하고 예술가들이 무대에서 이야기를 전한다. 바뀐 것은 목소리이고 아직 바뀌지 않은 것은 국가다. 이름을 다시 부르고 무덤을 다시 세우는 일, 그 사소한 의식이야말로 전쟁을 마침표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 사람을 다시 사람으로 부르기 위한 일, 그것이 기억의 시작이다. 그 시작은 외면하지 않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지금 어느 기억의 갈림길에 서 있다. 선택하지 않으면 잊히고 묻지 않으면 사라진다.

◆ 보훈은 예고된 책임이어야 한다

국가보훈부는 25일 오전 10시 대전컨벤션센터에서 6·25전쟁 제75주년 행사를 거행한다. ‘영웅들이 지킨 나라, 이어나갈 대한민국’을 주제로 열리는 행사는 참전용사의 희생과 자유의 가치를 미래세대에게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대전은 임시수도이자 금강방어선 전투가 있었던 호국보훈의 도시로 올해 처음 순회 개최지로 선정됐다. 행사에서는 1300여 명이 참석해 참전국 국기 입장과 감사 편지 낭독, 정부 포상, 뮤지컬 공연과 합창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특히 비정규군 공로자 유족에게 무공훈장이 수여된다. 강정애 장관은 “정부는 참전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을 국민과 함께 기억하고 미래세대들이 이를 계승해 국가유공자와 제복 입은 분들을 존경하는 사회, 보훈이 일상의 문화가 되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성심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바로 그날 충청 곳곳의 땅에서는 이름 없는 유해가 여전히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추모는 단지 행사가 아니라 책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기억은 기념식보다 오래 남아야 한다. 책임은 기획보다 앞서 있어야 한다. 국가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영웅만이 아니다. 기록되지 않은 이름과 목소리 없는 죽음 또한 역사의 일부다. 행사보다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는 방식의 추모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