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칼럼-길을 걷다] 초록빛 나라, 친해지고 싶은 아일랜드

2025-07-21     금강일보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 시가지. 사진=연합뉴스

힘이 센 나라가 근처에 있으면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강대국 주변 국가들의 역사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고초와 피해로 점철되어 왔다. 중남미, 아프리카 지역은 열강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막강한 함대 등 군대를 앞세운 침탈의 발걸음에 짓밟혔다. 가장 많은 식민지를 보유했던 영국이 바로 옆 작은 섬나라 아일랜드를 그냥 두었을까.

12세기 말 이후 영국은 아일랜드를 넘보기 시작하여 16세기 헨리 8세 치하 본격화되었다. 헨리 8세는 아일랜드를 영국 왕국의 일부로 선언하고 많은 정착민들을 이주시켰는데 17세기 올리버 크롬웰 시대 절정에 이르렀다. 크롬웰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땅을 몰수, 영국 개신교 정착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691년 리머릭 조약에서 영국은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앙을 인정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이후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차별과 억압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18세기 ‘프로테스탄트 우위’ 시대에는 아일랜드에서 행세깨나 하는 지주, 권력계급 대부분이 영국계로 채워졌다.

19세기 중반 ‘감자 대기근’의 피해는 엄청났다. 영국 정부는 무관심했고 형식적인 대응으로 아일랜드 인구 4분의 1이 죽거나 해외로 이주하였다. 이를 계기로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크게 불붙어 1919년부터 3년간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되었지만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 땅으로 오랜 분쟁의 도화선으로 남게 되었다.

아일랜드는 인구 500만 명이 약간 넘지만 국토는 대한민국의 7/10쯤 된다. 우리 민족처럼 외세에 대항하여 끈질긴 저항 의지를 실천해온 강인한 민족성으로 우리와 교감, 소통할만한 공통의 민족정기를 지니고 있어 더 가까운 우방으로 여겨진다. 감자마름병이 초래한 ‘감자 대기근’ 무렵 아일랜드인들의 해외 이주는 엄청나서 당시 아일랜드 800여만 인구 가운데 약 100만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이 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민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미국에만 3,000여만 아일랜드계 있는데 케네디, 바이든을 비롯하여 역대 미국대통령 가운데 24명이 아일랜드혈통이라고 한다.

본국은 물론 해외 아일랜드인들은 민족정신과 단결심 강화, 고유문화 전승을 위해 5세기 가톨릭을 전파한 패트릭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기리는 다양한 문화축제를 열면서 끈끈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먼 나라, 영국이라는 강대국 그늘에 가려진 탓인지 그동안 우리에게 그리 뚜렷한 이미지 형성이 어려웠던 아일랜드 문화와 역사를 깊이 이해하고 더 가까운 교류와 친선 협력을 도모했으면 한다. 자존수호, 투쟁의 역사를 공유한 민족 간 유대와 우정은 더 강력해질 수 있다. ‘슬픈 아일랜드’라는 슬픈 별칭으로 알려졌던 나라, 기나긴 영국 식민지배 기간의 그늘과 신산했던 역사의 그늘이 드리워진 표현이다. 800년 가까운 영국 지배 기간 중 모국어인 게일어가 소멸 위기에 처했던 아일랜드는 그리 많지 않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W.B. 예이츠, 조지 버나드 쇼, 사뮈엘 베케트, 셰이머스 히니 등 4명의 노벨문학상 작가를 배출했다.

고단했던 피지배의 역사, 치열했던 저항과 투쟁의 의지가 새겨놓은 굴곡진 과거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무심하게 펼쳐진 초록빛 들판과 오래된 도시 정겨운 골목 안 왁자지껄한 펍에서 오래된 기억과 새로운 정체성이 어우러지며 ‘슬픈 아일랜드’의 흔적은 씻겨나가는 듯싶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